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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클래식 / Classical

전설적인 오페라의 여신 마리아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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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2

CD 3


지난 해 라 스칼라에선 26년 동안이나 <라 트라비아타>와 라 스칼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공포의 벽'을 무너뜨린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티치아나 파브리치니(28)이라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이 소프라노는 1955, 마리아 칼라스가 보여준 <라 트라비아타>의 기념비적인 공연 이래, 라 스칼라의 냉혹한 관객들로부터 폭발적인 갈채를 이끌어 낸 최초의 비올레타가 되었다. 성급한 비평가들은 파브리치니를 '칼라스의 재래'라고 까지 떠들어댔지만, 사실 오페라의 역사에서 마리아 칼라스와 대등하거나 그녀를 능가할 예술가가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2의 칼라스'란 소리를 듣게 된 파브리치니 자신이 현명하게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
저는 제2의 칼라스가 아닙니다. 그녀가 남긴 기억에서 그 빛을 뺏거나 그녀의 그림자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지요. 우리는 칼라스에게서 그저 무언가를 배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녀의 말이다.
아마도 마리아 칼라스는 당대 성악가 가운데 가장 깊은 음악적 본능과 총명한 지력, 그리고 가장 빼어난 극적인 힘을 겸비하고 있었다. 1950년대엔 그녀의 걸출한 예술성은 차치하고, 그 목소리 자체만도 심금을 꿰뚫는 힘과 개성, 그리고 풍부한 색채를 지닌 무한한 감명 깊은 악기라 할 만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서서히 그의 목소리는 결함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1965 42세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녀는 코벤트 가든의 <토스카>공연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수년 뒤 다시 무대로 돌아와 1973년부터 74년까지 옛 파트너였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더불어 세계 순회 콘서트를 가졌으며 74년엔 우리나라도 다녀갔다
.
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현저히 약화되기는 했으나 그 비견할 수 없는 예술적 힘은 전혀 감퇴되지 않았다는 게 정평이었다.

이와 관련해 칼라스가 1971-72년에 걸쳐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갖고 있을 무렵, 그녀의 수업을 참관했던 헨리 비스네스키가 <전설 뒤의 예술>이라는 칼라스에 관한 저서 속에서 기술하고 있는 장면은 감퇴되지 않는 칼라스의 유례없는 예술성을 웅변해 준다.

"그녀의 참으로도 압도적인 노래의 힘은 <리골레토> '정신들아(Cortigiani)......'부분을 토의하고 난 다음에 나타났다.

그는 젊은 바리톤에게 리골레토는 '마치 눈먼 동물처럼 미칠 듯이 포악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왼손을 들며 비상하게 빠른 템포를 피아니스트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정신들아, 천벌을 받을 놈들(cortigiani, vil razza)'의 구절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가 욕설을 퍼붓는 이 짧은 구절을 소리칠 때 그녀의 두 손은 흡사 발톱처럼 구부러지고 얼굴은 어릿광대의 공포와 분노를 반영하고 있었다.
좌중은 자리에 붙박인 채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가장 격렬한 순간에 칼라스에게서 방출되는 전류에 관해 단순히 말로만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의 표현력이 창출하는 압도적인 충격을 완전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1분도 지속되지 않는 이 짧은 장면이 끝났을 때 객석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페라의 예술사에 불후의 기념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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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는 모국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열여덟 살 때(1941)에 데뷔했지만, 진정한 그녀의 이력이 시작된 것은 1947, 베로나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에 출연하고부터였다. (칼라스는 그리스인을 양친으로 1923 12 2일 뉴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나 14세 때 어머니, 언니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가 아테네 음악원에서 유명한 소프라노 엘비라 히달고를 사사했다. 학생신분으로 2차적 배역에 출연하다 졸업 후(1941) 아테네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토스카>로 데뷔, 이후 3년 동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피델리오>의 레오노라 역 등에 출연했다.)
그 때까지 오페라 계에서 그녀 장래는 퍽이나 불투명했으며 사실 무척 비관적인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65년에 무대를 떠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이탈리아의 모든 중요한 오페라를 포함해서 글루크와 하이든, 모차르트, 스폰티니와 케루비니, 그리고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종류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
특히 <노르마>를 비롯해서 <메데아>,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그리고 베르디의 <멕베스>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토스카> 등에서 오페라 예술사에 불후의 기념비를 세웠다.

마리아 칼라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세계의 모든 신문들은 탐욕스럽게 그녀의 예술뿐만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것까지 칼라스에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나 독자들의 물릴 줄 모르는 호기심을 채워 주는 원천이었다.
특히 칼라스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1956-57년에 그녀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거리가 되었을 만큼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느꼈다. 오페라 계의 모든 이들이 그녀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느꼈고, 모두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언급했다
.
그녀는 대중과 신문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기 전에는 어떤 말과 행동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몸이 불편해서 출연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대로 신문에 발표되지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곤 했다. 의사들, 사회학자들, 심지어 거리의 사람들까지. 따라서 칼라스의 예술엔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들마저 당연히 그녀에 대한 가십 몇 개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1959년 칼라스가 12년 동안 유례없이 다정한 부부로 함께 생활해 온 남편을 버리고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줄행랑을 쳤을 때 절정에 이르게 된다.

 

"나처럼 행복한 아내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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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했으니만큼 칼라스의 생전에 이미 그녀에 관한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음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칼라스 사후 1970년대 말쯤에 이르러 칼라스에 관한 책들은 대략 20여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우습게도 이 가운데 칼라스가 오페라 가수로서 가장 위대한 성공을 누렸던 시기에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책은 한 권도 없었다(즉 모두가 칼라스 부부가 헤어진 다음에 그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쓴 것이었다). 사실 칼라스 자신이 자서전을 써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며 이런 부탁을 수락하기까지 했지만 끝내 실천하지는 못했다. 죽기 몇 달 전 칼라스는 회고록을 쓰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 관해서 무엇이나 다 알고 있는 오직 한 사람, 즉 나의 남편만이 나의 전기를 쓸 수 있습니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하루 아침에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았을 때까지 칼라스 부부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한 쌍이었다. 이탈리아의 대부호로 예술 애호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남편이자 보호자요 매니저였으므로 둘은 예술과 생활을 완벽하게 공유했다. 메네기니에 대한 사랑의 선언은 1950년대를 통해 칼라스가 기자회견에서 줄곧 견지해 온 모티프였다. "제 남편처럼 다정하고 민감하며 친절한 사람과 더불어 누리는 결혼 생활의 행복을 자랑할 수 있는 아내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메네기니는 12년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생일날 아침이면 열렬한 사랑의 편지와 생일선물이 책상 위에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바티스타, 당신은 나의 삶 전부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신처럼 존경한답니다. 나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잘 돌보길 애원해요. 당신의 마리아' 혹은 '나의 행복이여,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한층 깊이 당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남편이에요. 당신 없이 나는 생명도 기쁨도 누릴 수 없을 거예요'

칼라스는 어쩌다 공연 때문에 남편과 멀리 떠나 있을 땐 언제나 긴 편지를 보냈고, 집에 함께 있을 때도 남편의 눈에 띄도록 그의 책장이나 침대 위에다 항상 꽃다발과 함께 사랑의 메모를 남겨두곤 했다. 그리고 이 같은 습관은 12년 결혼생활 동안 줄곧 지속되었으며 사실상 오나시스와의 사건이 있기 몇 주전까지도 계속됐다.

'당신을 숭배해요. 나의 영혼이여'

'세월이 갈수록, 사랑하는 이여, 이전보다 더욱더 나는 당신을 숭배한답니다'

혹은 또 이런 것도 있다. '내가 멀리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짜증이 나고 피곤할 때면 당신이 나를 위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나는 다만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많은 기쁨을 주신걸 감사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나처럼 운이 좋고 행복한 아내는 없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 줬으면 해요. 우리가 이처럼 항상 만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비세요. 당신의 충실한 아내 마리아'

이처럼 하나같이 사랑에 가득 찬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오페라 계의 '호랑이'로 불렸던 '거만하고 변덕스러우며 전제적인 디바(Diva)'였던 것이다. 주로 칼라스의 성격상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온 가십 기사에 너무나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이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와 메모들을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가지고 오랫동안 간직해 온 메네기니가 그녀의 사후 몇 년이 지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공개하지 않았던들 칼라스의 진정한 인간적인 면모와 여성적 특질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칼라스에 관한 모든 책들은 대부분 그녀의 공연을 자주 보았거나 그녀와 직접 알고 지낸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부분은 무대 위의 그녀를 단 한번 보았거나 그녀와 단 몇 분간 얘기를 해 본 것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그녀의 예술에 대한 결론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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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서의 칼라스에 대해서 말하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칼라스에 대해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12년 간이나 칼라스와 '모든 것을 공유했던' 그녀의 남편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1977년에 칼라스가 사망한 후 많은 잡지사에서 다투어 메네기니에게 회고록 집필을 권유했으며 심지어 프랑스의 어떤 출판사는 백지수표까지 동봉한 출판 권유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리아와 함께 공유한 내밀한 세계를 세상에 공개한다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제의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날조된 내용으로 가득 찬 엉터리 전기들이 계속 출판되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
메네기니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양한 출판물에 나타난 자기와 마리아와의 결혼생활에 대한 악의적인 언급이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에 관한 부분은 어느 페이지나 다 조소적이고 부정적인 어조로 기술돼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메네기니가 마리아보다 28년 연상이란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그는 자기들의 가장 내밀한 감정이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마리아를 위해 살았고, 나의 삶의 대부분을 그녀를 위해 헌신했으며 한결같이 그녀를 사랑했다. 이제 나는 그녀와의 추억을 지키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이다. 덕택에 우리는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마리아 칼라스의 진정한 인간적 면모, 전설화된 신화 속의 <라 디비나>의 베일 뒤에 숨은 '여성 칼라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부애와 가정의 행복에 대한 청교도적 결벽성 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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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 겨의 언제나 예술을 위해서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특히나 여성의 경우 가정보다 예술을 우위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 예술가상으로 이해되고 있거니와, 이 같은 선입견이 자주 한 예술가의 인간적 측면을 실제와 다르게 포장해서 '전기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왜곡된 인간상'을 창조하게 되는 수가 허다하다. 마리아 칼라스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언제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예술이라고 주장해 왔다. 물론 예술, 즉 노래하는 것은 그녀가 열광적으로 추구하고 헌신한 천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메네기니와 함께 생활하는 기간에 칼라스의 최대 관심사는 두 사람의 사랑과 상호 행복이었다.

"만약에 바티스타가 요구한다면 나는 그를 위해 나의 이력을 포기하기까지 할 거예요"라고 그녀는 자주 공언했던 것이다.

부부간의 애정과 가정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칼라스의 태도는 적어도 오나시스와의 '사건'이 있기까지는 거의 청교도적인 결벽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신념은 그녀의 교우 관계에도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를테면 어느 땐가 칼라스 부부와 친밀히 지내던 친구가 자신의 아내에게 심하게 대하다가 마침내 별거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칼라스는 그를 다시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 칼라스의 집을 자주 드나들던 한 친구가 부인을 버렸을 때는 그를 집안에 들여 놓은 하녀를 꾸짖고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처를 버렸으니 이제 더 이상 우리 친구가 아니에요
"
또한 잉그리드 버그만 부처는 칼라스 부부와 친한 사이였는데, 버그만이 남편과 이혼했을 때 그녀는 버그만을 비난하며 다시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칼라스의 여성적 본능은 아기에 대한 열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칼라스는 결혼 직후부터 열렬히 아기를 원했으나 끝내 이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많은 전기는 칼라스가 예술을 위해 아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어떤 전기에선 그녀가 아기를 원했지만 남편이 그녀의 이력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거부했던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신체적 결함이 임신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칼라스 부부는 둘 다 열렬히 아기를 원했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들을 비롯해서 여러 전문의들과 수없이 상의하고 검사를 받았으며 가능한 온갖 시도를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녀의 자궁이 기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수술을 한다면 다소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칼라스는 수술을 거부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라스는 평생의 적수였던 레나타 테발디가 일생 독신으로 아이도 갖지 않았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오페라 계의 생리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수한 매니저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아무리 그가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한다 해도 능력 있고 양심적인 매니저를 갖지 못한 가수는 무대에서 빛을 보기도 힘들뿐더러 재정적인 이익을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그처럼 오랜 기간을 세계의 오페라 무대에서 여신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며 보호자인 탁월한 메네기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거물 메네기니의 눈에 띤 빈털터리 무명가수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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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기니가 칼라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는 7년의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명의 가수였다. 메네기니의 도움으로 칼라스는 극히 짧은 시일 내에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되었으며, 남편을 떠난 후로는 한동안 명성의 광휘를 누리긴 했으나 곧 그녀의 경력은 쇠퇴했다. 칼라스 자신이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전적으로 나를 의탁할 수 있는 남편을 매니저로 가졌어요. 그는 나를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만들 수 있답니다"

오페라 계에서 종종 물의를 일으켰던 칼라스의 불 같은 논쟁과 공격적인 태도는 실은 모두 메네기니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칼라스는 원래 조용하고 평화적인 성격이었다. 세계의 어느 극장에서나 여왕처럼 대접해 주는 환경 속에서만 그녀가 노래하기를 원했던 메네기니의 책략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칼라스가 죽은 뒤 테너 자코모 라우리-볼피가 메네기니에게 써 보낸 편지는 예술가 칼라스와 매니저 메네기니와의 관계를 잘 요약해 설명한다.

'당신이 없었다면 칼라스는 그녀를 향한 극장가의 적의를 극복하고 오페라의 영역에서 그와 같은 절정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오페라 예술사에 그녀의 인격을 그처럼 뚜렷이 각인시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국제적인 사교계의 소용돌이의 늪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기 전에 승리를 구가했던 사람은 마리아 '메네기니'였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기적이 이미 성취되고 난 후에 그걸 물려 받았던 것이지요'

마리아 칼라스를 다루는 모든 책은 한결같이 베로나의 아레나 극장에서 가진 칼라스의 데뷔공연 <라 조콘다>를 전설적인 승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설이 자주 그렇듯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연은 훌륭했으나 특별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 새로운 스타가 예고될 때면 늘 그렇듯이 계약 제의가 쇄도하기는커녕, <라 조콘다> 4회에 걸친 공연이 끝난 후 칼라스는 단 한 건의 제의도 받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설은 또한 칼라스의 이력이 시작될 무렵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도와줬다고 하지만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칼라스를 도와줬노라고 자랑했지만 그건 모두 그녀가 유명하게 되고 난 후의 일이었고 사실은 누구나 그를 착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라스는 우수한 목소리와 성악가로서의 훌륭한 교육적 바탕을 지니고 있었지만 뉴욕에선 아무도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뉴욕에서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베로나 출신의 베이스 티콜라 로시-르메니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베로나 아레나 극장의 공식적인 디렉터는 베로나의 유명한 테너로 주로 뉴욕에서 살고 있던 조반니 제나텔로 였는데, 르메니는 베로나의 여름 시즌을 준비하고 있는 제나텔로에게 마리아 칼라스를 라 조콘다로 추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나텔로는 당시 2년 동안이나 무대에 서보지 못한 칼라스의 다급한 처지를 최대로 악용했다. 그는 칼라스를 아주 형편없는 가수로 치부하고는, 베로나의 계약을 거의 모욕적인 조건으로 제안했다(4회 공연에 매 공연마다 4만 리라를 지불).

그러나 칼라스는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돈이 없어서 이탈리아행 여비를 대부로부터 빌려야 했다. 게다가 가난한 이민들이 대개 그랬듯이, 실로 꼰 마분지 상자를 여행가방 대신 들고서 러시아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항해 도중 숱한 역경을 겪고 소지품도 일부 약탈당한 채, 겨우 나폴리에 정박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기차를 타고 베로나에 갔는데, 하루 반이 걸리는 이 여행에서 그녀는 앉을 자리가 없어 통로에 서 있어야만 했다. 칼라스로선 이탈리아에의 여행이 마지막 희망이었으며 다가올 아레나 공연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칼라스가 <라 조콘다>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의 정확한 사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1947 6 29일이었다. 그녀에겐 이탈리아가 초행이었다. 그리고 베로나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칼라스는 메네기니를 만났던 것이다. 당시 52세의 독신이었던 메네기니는 12개의 공장을 베로나에 소유한 이탈리아 굴지의 사업가로 오페라 계에선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열광적인 오페라 애호가였던 그는 극장 관리인과 지휘자, 가수들과 친한 사이였고 사실상 오페라 계에 유형 무형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아레나 극장의 스텝진들이 공연 기획에 대한 협의를 할 때면 대부분 그도 한몫 끼곤 했다. 또한 그는 재능이 있는 무명의 젊은 가수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기도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중의 누구도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레나 극장의 실무를 맡고 있던 친구 포마리가 경영하는 레스토랑 페다베나의 위층에 살고 있던 메네기니는 칼라스가 도착하던 날 밤 아레나의 친구들에게 붙들려, 이들이 칼라스와 더불어 식사를 하고 있던 식탁에 합석하게 되었다. 마에스트로 세라핀이 두 사람을 소개했는데,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첫 인상을 보고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처녀를 바라보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아주 당당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대단히 둥글고 가슴이 풍만했으며 어깨가 당당했다. 그리고 검은 머리에 강렬한 눈을 하고 있었다"

칼라스는 미국에서 함께 온 로시-로메니가 그녀와 계약한 오페라의 흥행사며 변호사인 리처드 마가로지의 부인과 동석하고 있었는데, 메네기니는 이들에게 다음날 베니스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메네기니가 칼라스를 향해 진정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은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그녀가 앉아 있었을 때는 비록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긴 했어도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서자 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녀의 다리 아래 부분은 기형이었다. 장딴지가 너무 굵어 발목이 부어 있었고 몹시 힘들게 걷는 모습은 꼴사납기까지 했다. 나는 일행 중 몇 사람이 경멸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곁눈질하며 웃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녀는 그걸 눈치챘는지는 모르나 한 켠에 비켜서서 눈을 내리깔고 걷고 있었다"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한 '사업상'의 흥정

 

다음날 메네기니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초대에 응할 수 없다는 칼라스를 강권하다시피 해서 일행과 더불어 베니스로 데려갔는데 여행 중 줄곧 침묵을 지키던 칼라스는 산 마르코 광장의 야경을 보자 사람이 확 달라졌다. "......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녀는 소리쳤다. 눈은 빛나고 온몸이 눈앞의 풍경에 도취된 것 같았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녀의 과묵은 사라지고 말이 많아졌다. "당신이 옳았어요. 이것만으로도 이 도시를 여행할만한 가치가 있어요. 내게 이토록 비할 데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그녀는 거듭거듭 메네기니에게 감사했다.

베로나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두 사람만이 타고 있었다) 마리아는 딴 사람이 된 듯 그날 저녁 자신이 본 모든 것에 관해 쉴새 없이 얘기를 늘어 놓았다. 그리고 이윽고 화제는 자기자신에게로 옮아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관계, 그 동안의 이력과 뉴욕에서의 쓰라린 체험,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마리아는 훌륭한 인격자인 아버지를 숭배했으나 어머니는 증오했다. 그녀의 모친은 남편이 딸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서 그와 이혼할 결심으로 아이들을 혼자서 그리스로 데려가 자기 식으로 교육했는데, 마리아보다 4세 위인 언니를 극도로 편애해서 두 딸을 마치 콩쥐팥쥐 식으로 대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력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엔 젊은 사람들의 특징인 '열광'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슬프고 비관적이었다. 그녀의 말은 냉랭하고 약간 비통해하기도 했다. 그것은 환멸과 희생과 수치에 익숙해진 사람의 말이었다"라고 메네기니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칼라스는 자신이 어째서 베니스에 오기를 거절했던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털어 놓았다. 그녀는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전날 저녁에 입었던 블라우스를 다시 입고 가기가 창피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옷을 살수도 있었겠지만, 제겐 돈이 한 푼도 없었거든요"

그들은 새벽2시에 비센차에 도착했으나 차 속에서 얘기를 더 계속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말이오?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말이오" 메네기니는 물었다.

그녀는 이 물음에 약간 당황해서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쳐다 보았다.

"이런 꼴의 내게 대체 누가 관심을 갖겠어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요"하고 메네기니는 위로하듯 말했다. "저는 자신을 속이는 데 습관이 돼 있지 않아서요" 이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이 순간 메네기니의 마음 속에선 칼라스를 도와주려는 결심이 확고해졌다.

"나는 이 처녀를 도와 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해를 사지 않고 내 뜻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일까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오페라에 관심이 있어요. 이미 나는 다른 젊은이들을 도와준 적이 있소. 나는 당신이 재능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해요. 그러니 만약에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 역시 도와주고 싶어요. 생각해 보시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나는 당신이 날 신뢰해줬으면 해요' 그녀는 감동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베로나로 돌아왔다"

이것이 세기적 소프라노와 위대한 매니저와의 역사적 관계가 시작된 '진상'이었다.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오페라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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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기니는 약속대로 다음날 마리아에게 공식적인 편지를 보냈고 마리아는 전화로 이에 답했다. 그리고 이틀 후 메네기니는 마리아를 가르다 호반으로 데려가 식사를 하면서 정식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새해까지는 6개월이 남았소. 이 기간 동안 나는 필요한 모든 것-호텔, 레스토랑, 의상실 등을 주선하겠소. 당신은 오직 내가 당신을 위해 선택한 마에스트로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공부만 하면 돼요. 이 해의 마지막에 우리는 결산을 해보는 거요. 만약에 우리 둘 다 만족한다면 장래 우리의 직업적인 관계를 전반적으로 규정할 계약을 체결합시다"

마리아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바로 같은 날 메네기니는 마리아 칼라스를 위한 오페라 작품들을 오케스트라용으로 관현악화하기 시작했고, 아레나 극장의 오페라 코러스 마스터인 페루치오 쿠지나티를 마리아의 성악교사로 초빙했다. (엘비라 히달고는 칼라스에게 노래의 테크닉을 가르치고 그녀에게 음악의 세계를 열어줬지만, 칼라스의 모든 오페라 레퍼토리를 가르친 사람은 구지나티였다. 칼라스의 어떤 전기에서도 이 이름은 취급되지 않고 있지만 칼라스 자신도 공언했듯이 쿠지나티는 그녀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사실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사업상 협정은 완벽한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되었다. 숱한 그릇된 전기들에 의해 형성된 칼라스에 관한 전설은 칼라스의 베로나 데뷔 공연에서 제나텔로나 메네기니가 그녀를 '발견'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칼라스를 발견하지는 않았다. 칼라스의 노래를 한마디도 들어 보기 전에 메네기니는 오직 그녀의 '이야기'에 감동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젊었고 필사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했을 뿐이다"

'오페라의 디바' 칼라스는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명성을 획득했을 무렵에 처음으로 그녀를 본 사람들은 이 날씬하고 우아한 몸매의 프리마돈나가 한때는 대단한 뚱보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오페라 극장의 제왕 격인 라 스칼라를 정복한 1951년까지도 그녀는 210파운드(95kg)가 넘는 거구였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은 아무리 살이 쪄도 매력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움을 유지했지만, 두 다리는 기형적으로 뚱뚱했고 발목은 과중한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언제나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에게 첫 성공의 길을 열어 준 베로나의 <라 조콘다> 공연 때도 그녀의 부은 발목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기가 힘들어 무대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같은 결점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체중 30kg 감량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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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리아 칼라스는 1937(14),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가기 위해 미국을 떠났을 때만 해도 날씬한 소녀였다. 아테네에서 달걀 요법에 근거한 의학적 치료를 받은 후부터 그녀는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또 일종의 선 질환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나는 체중을 감당할 수 없어 자주 차 한잔만으로 식사를 대신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칼라스의 비정상적인 비만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치즈와 과자류를 엄청나게 탐식했기 때문이라고들 말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 자주 기사화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칼라스의 '게걸스런 식욕'이 애정의 결핍으로 인한 보상 심리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심리학적 해석을 내리기까지 했지만, 이야말로 멋대로 상상한 환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자주 차 한 잔밖에 마시지 않고 외출했기 때문에 아침마다 친척 한 사람이 계단 꼭대기까지 내 뒤를 따라왔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한 칼라스 자신의 고백이 이를 증언했다
.
1945
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자 칼라스는 엄격한 다이어트를 실천했는데, 자전적인 스케치에서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

"
나는 218파운드(100kg)에서 170파운드(80kg)로 떨어졌다. 후에 이탈리아에 갔을 땐 155파운드까지 내려갔는데, 이때가 베니스에서 <투란도트> <트리스탄과 이졸데>, 플로렌스에서 <노르마>를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맹장염 수술을 한 뒤에 다시 22파운드 더 늘어나더니 1950년과 51년 무렵엔 어떤 명백한 이유도 없이 자꾸 체중은 자꾸자꾸 불어났다
'

칼라스의 체중이 최고로 불어났을 즈음 브라질에서 있었던 한 사건은 그와 같이 엄청난 거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 참으로 흥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또한 칼라스의 성격상 특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에 특기할 만한 것이다
.
1951
, 라 스칼라의 공식적인 데뷔를 석 달 앞둔 9월에 칼라스는 스칼라의 단원들과 더불어 브라질 순회 공연 길에 올랐다. 그녀는 상 파울루와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여러 오페라의 아리아로 구성된 8회 공연을 계약했는데, 칼라스와 그녀의 적수 레나타 테발디는 같은 배역을 교대로 노래하게 돼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라 스칼라 입성은 다른 가수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중대한 위협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시작된 온갖 음모와 책략에서 최초의 결실을 본 것이 칼라스와 당시 라 스칼라의 지배적인 여신이었던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적대관계였다. 이 같은 적대관계는 두 소프라노의 광적인 팬들까지도 원수 같은 양대 진영으로 갈라놓아 온갖 소동을 일으키곤 했다. 어떤 의미로 두 사람은 광적인 팬들의 음모에 말려든 희생자라 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 탄생한 유명한 '칼라스-테발디 불화'는 거의 10년 동안 전세계의 신문에 끊임없이 기사화되었고 오늘날까지 오페라를 이야기하는 책에서 다루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적대관계'가 최초로 표출된 것이 바로 브라질 순회공연에서였다.)

그런데 테발디가 상 파울루로 가고 없는 동안 아직도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몇 번의 공연을 앞두고 있던 칼라스는 <토스카>를 성공적으로 공연하고 두 번째 <토스카>에 출연하려고 했을 때 아무런 이유나 예고도 없이 자신의 이름이 출연자 명단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라 스칼라의 단원을 브라질에 초청한 사람은 브라질 5대 부호의 하나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던 바레토 핀토였다. 작은 체구에 대단한 추물이었던 핀토는 브라질의 여러 극장의 디렉터로서 원칙도 미학도 없이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마치 독재자처럼 오페라 시즌을 운영하곤 했다. 오페라 레퍼토리와 출연자들을 결정하는 것도 그의 마음대로였고, 아무도 감히 그에게 반대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
마리아 칼라스는 그날의 포스터에 자신의 이름만 캐스트에서 빠진 걸 보자 곧장 핀토의 사무실로 달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있던 남편이 말릴 새도 없었다. 그녀는 스칼라의 다른 가수들에 둘러싸여 책상 뒤에 앉아 있는 핀토 앞으로 돌진해가서 소리쳤다
.

"
이것 봐요. 어째서 나를 교체했죠
?"
"
지난 밤 당신은 형편없었기 때문이오
"
"
, 당신 의견으론 내가 형편없었다고?"

그녀는 불같이 화가 나 으르릉거리며 핀토의 책상 위에 있는 20파운드나 되는 거대한 청동 잉크 스탠드를 들고 소리쳤다.

"방금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해봐요. 당신에게 그럴 배짱이 있다면, 나는 당신의 골통을 으깨어 버릴 테니"

그녀의 남편과 주위사람들이 당황해서 말리는 사이, 핀토는 겁에 질려 의자 속으로 기어들며 말했다.

"경찰을 불러 당신을 협박죄로 체포하도록 하겠소"

눈 깜짝할 사이에 칼라스는 사람들을 밀치고 황소처럼 핀토에게 돌진해 무릎으로 그의 가슴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리쳤다. 핀토는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메네기니는 황급히 칼라스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메네기니가 극도로 불안해 한 것과는 반대로 칼라스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골통을 깨부수지 않은 게 유감일 뿐이에요. 나는 그 작자가 싫어요. 이 나라에선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겠어요"

얼마 뒤 과연 걱정한 대로 호텔로 사람이 왔지만 경찰은 아니었다. 핀토가 보낸 사람이었는데, 그는 칼라스의 아직 남아있는 공연까지 포함한 출연료 전부가 들어있는 봉투를 전했다. 핀토는 얼마나 혼이 났던지 칼라스 부부를 위한 비행기 표와 자동차까지 다 준비해 뒀으니 제발 브라질을 떠나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100kg
의 거구에서 날씬한 여인으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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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과중한 체중이 때로는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이점도 있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이란 관점에선 확실히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미적 감각이 예민한 칼라스 같은 예술가에겐 자신의 꼴사나운 자태는 일종의 저주였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게 불어나는 체중은 그녀를 때때로 절망에 빠뜨렸으며, 그에 반비례해서 그녀는 거의 처절할 만큼 엄격한 다이어트에 집착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가장 혹독한 다이어트의 노예였다. 케이크 종류는 절대로 입에 대지도 않았고, 구운 고기나 익히지 않은 야채를 양념이나 기름을 전혀 치지 않은 채 먹었다.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고 단지 극소량의 와인만 취했으며 디저트 류 또한 입에 대지도 않았다.
다만 쇠고기 안심과 스테이크만은 그녀를 미치게 했다. 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뼈다귀까지 핥아 먹었으니까. 어느 땐가 라 스칼라에서 노래하고 있던 기간에 저녁 7시쯤 극장 식당에서 칼라스 부부가 식사를 했을 때, 마리아는 무려 28온스(800g)의 스테이크를 먹어 치운 일도 있었다. 이걸 본 사람들은 눅나 그녀가 위 속에 그처럼 엄청난 양의 음식물을 넣고서 어떻게 노래를 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 같은 예외를 빼고는 수년 동안 치열하게 고수해온 다이어트에도 불구하고, 칼라스의 체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이력이 쌓일수록 높아가는 명성도 자신의 보기 흉한 몸매에서 오는 칼라스의 슬픔을 해소해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수수한 옷만을 입었고, 보석이나 액세서리를 피했다. 뚱뚱한 몸에는 어떤 옷도 맵시 있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거기다 또 그녀는 항상 다양한 피부질환에 시달리곤 했다. 언제나 부어있는 다리, 쓰라린 발목, 끊임없는 피부병, 그리고 지속적인 피로...... 이 모든 것이 실은 그녀의 과중한 체중에서 온다고 생각한 메네기니는 아내를 데리고 여러 전문의들을 찾아 다녔으나 효과가 없었다. 기적을 행한다는 소리를 듣는 저명한 의사 코파 박사는 칼라스를 정밀 검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건강합니다. 당신에겐 아무런 병도 없어요. 그러니 치료할 필요가 없지요. 당신이 앓는다면 그건 당신의 머리 속에서만 앓는 겁니다. 당신네 예술가들은 모두 약간은 미쳐 있거든요. 게다가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뛰어난 예술가이니 딴 사람들보다 약간 더 미쳐 있을 수 있지요."

사실을 말하면 많은 의사들이 칼라스에게 약을 처방해 주거나 다이어트 충고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그러한 처방이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다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약들을 갖고 있었지만, 어떤 전문가도 이 유명한 가수에게 그것을 실험해 보기를 꺼렸던 것이다.
칼라스의 예술성에 대한 평판이 높아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그녀의 뚱뚱한 몸은 점차 더 그녀를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녀는 더욱 자주 신문에 나타나고, 중요한 인사들과 만나며 리셉션에 초대되고, 우아한 여인들과 어울리게 되니, 이 때문에 자주 실제로 앓기까지 했다
.

삶과 예술 활동에 결정적 영향 미친 체중 감소


또한 그녀는 주로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어두운 색깔의 옷만을 입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사진 찍히기를 극력 거부했다. 여행을 할 때면 호텔에 체중계가 없거나 정확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 항상 자신의 체중계를 짐 속에 넣고 다녔다.
이러던 그녀가 1953년 말쯤엔 갑자기 살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1 12월에 그녀의 몸무게는 210파운드였는데, 1954-54년 시즌이 시작될 무렵엔 144파운드까지 내려갔다. 정확하게는 1953년 말 그녀의 체중은 전혀 예기치 않게 뚝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1954년쯤에 그녀는 완전히 날씬한 여인이 돼 있었다
.
칼라스의 이 같은 '변신'은 신문과 잡지에서 다투어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의사들과 영양학자들이 그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중반엔-특히나 여성들 사이에선-마리아 칼라스는 그녀의 노래보다도 신비스런 체중감소 때문에 더 유명했다. 매일처럼 그녀는 그녀의 비밀을 밝혀 달라고 애걸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여성들로부터 받곤 했다
.
여러 가지 제품들을 제조하는 보건소와 상회들은 '칼라스 처방서'에 대한 배타적 특허를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그녀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칼라스의 신비스런 체중감소를 재빨리 광고에 이용한 경우가 유명한 '판티넬라 제분회사 사건'이었다. 1954 2월 두 개의 주간지에 마리아 칼라스가 '판티넬라 제분회사의 제과요법'에 의해 체중이 줄어 들었다는 광고를 실었는데, 거기엔 바로 이 요법을 칼라스에게 시행했다는(사실이 아니었다) 의사(메네기니의 매제) 조반니 카지롤리 박사의 서명이 있었다. 본인에게 어떤 사전 양해도 승낙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상업적 광고에(그것도 허위 사실로) 이용한 이 같은 횡포에 미칠 듯이 화가 난 칼라스는 당장 광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사건을 법정으로 몰고 갔는데, 소송은 5년이나 질질 끌었다. 판티넬라 회사의 사장인 파켈리 공은 법률가로서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12세의 조카였던 관계로 교황을 비롯해서 수많은 고위층 인사들이 이 사건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이 죽은 후 5년 만에 마침내 사건은 칼라스의 승리로 끝났다)


사실 남편인 메네기니조차 어떻게 그녀가 그런 변신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알아내고자 했을 정도였다. 신문들은 별별 희한한 이론과 부조리한 가설들을 창안해 내었는데, 완벽한 몸매에 대한 필사적인 열망 때문에 칼라스는 끔찍한 단식과 야수 같은 다이어트, 그리고 비밀의 요법을 실천했다고들 떠들었다. 심지어 어떤 필자는 칼라스가 스위스의 저명한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 의사는 칼라스에게 촌충을 섭취할 것을 권고했다는 얘기를 쓰기까지 했다. 그래서 칼라스는 그의 충고를 따라 샴페인 잔 속에 '체중을 줄이는' 기생충을 넣고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마리아 칼라스가 일종의 꼴사납고 거추장스런 한 마리 고래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으로 '변신'시킨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53년 말 메네기니 부부가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베르디가 운명한 방의 바로 옆방)에 묶고 있었을 때 라 스칼라의 공연을 보기 위해 메네기니는 혼자 외출했는데, 이런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극장에서 30분쯤 지났을 때 수위가 그에게 와서 마리아에게서 즉시 호텔로 돌아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그가 혼자 외출할 때면 이런 일은 다반사 였으므로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극히 하찮은 일을 가지고 걸핏하면 그녀는 이 같은 전화를 하곤 했다. 먹을 것이 생겨 함께 먹고 싶다든가 혹은 '그저 함께 있고 싶으니 곧 돌아와 달라'는 따위의 순전히 어린애 같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는 두말 없이 그녀의 청에 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긴급한' 전갈은 혹시 베로나에서 당시 병중에 있던 그의 노모에게서 무슨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그는 객석을 빠져 나왔다. 그가 전화를 했을 때 마리아는 몹시 흥분한 상태에 있었다. "뭐라고요? 아직도 극장을 안 떠났단 말예욧?" 그녀는 고함을 쳤다. "날 혼자 내버려 두면 안돼요. 바티스타, 제발 곧장 와요. 나는 그걸 죽였어요
!"
"
뭐라고?" 그가 물었다. "와요, 빨리, 빨리" 그리고는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
아내의 격렬한 기질을 익히 알고 있던 메네기니는 그녀의 '죽였다'는 말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실은 칼라스가 목욕을 하다 촌충을 죽였던 것이다. "걱정 말아요. 그건 극히 흔한 기생충인 걸. 당신처럼 날음식을 상식하는 사람에겐 흔히 있는 일이야" 그리고 그는 밀라노의 의사에게 연락했고, 의사는 나머지 촌충도 박멸해야 한다면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이틀 후 촌충은 완전히 구제되었다
.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된 줄 알았는데, 다음 몇 주 동안 마리아는 자기 속의 무엇인가가 깜짝 놀랄 만큼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생활은 전처럼 계속되었으나, 자신이 전적으로 다른 인간이 된 것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녀를 정기적으로 괴롭히던 여러 가지 질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녀는 한층 더 기민하고 자유로워졌으며, 기적과도 같이 1주일 만에 체중이 무려 6파운드나 떨어졌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칼라스 부부는 의사의 도움을 얻어 이 모든 변화가 촌충을 제거한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촌충은 체중을 떨어뜨리는데 반해, 마리아 칼라스에겐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세기적 소프라노를 보기 흉한 뚱보로 만든 원흉은 바로 촌충이었던 셈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일단 그것이 제거되고 나니 체중은 저절로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
섭생규칙은 전과 같이 지켰다. 빵과 케이크는 안 먹고, 구운 고기와 스테이크, 양념 안친 다량의 채소, 소량의 물, 그리고 와인 한 모금. 그 외 그녀는 매일 마사지를 계속했다. 수년 동안 이 같은 일과는 어떤 특별한 성과도 못 거두었지만, 이제 그것은 경이로운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녀는 1년 만에 90kg에서 60kg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따금 메네기니가 아내의 체중이 너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할 때면 칼라스는 불같이 화를 내게 되어 곧잘 부부는 대판 싸움을 하기도 했다
.

체중이 줄어듦에 따라 칼라스의 기질도 변했다. 그녀는 한층 더 침착하고 쾌활해졌다. 정력은 배가 되고 더 이상 피로나 노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보통 뚱뚱하던 사람이 갑자기 살이 많이 빠지면 피부에 탄력성이 없어지는데, 칼라스에겐 그 같은 변화가 안 일어났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팽팽하고 부드러우며 빛이 났다. 그녀는 우아한 옷차림을 하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훨씬 더 대담하게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한 마디로 마리아 칼라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인격의 여인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한 예술가의 육체적인 변모가 그의 전 삶의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와 같이 흥미 있는 예는 사실 그리 흔치 않다. 칼라스의 신체적 변모는 그녀의 삶과 예술 활동에 근원적인 요인이었으니, 진실로 그녀의 체중이 90kg에서 60kg로 떨어진 1953년은 칼라스의 삶과 예술의 분기점이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오페라의 역사에서 한 장을 장식하게 된 획기적인 발단이기도 했다
.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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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페라에는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지만, 칼라스의 이력에서 토스카니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다. 1947년 베로나 데뷔 이래 칼라스는 승리에서 승리로 나아가며 거의 이탈리아의 전역을 정복했지만, 오직 최고의 오페라 전당인 라 스칼라만은 그녀에게 마치 밀봉된 문처럼 닫혀 있었는데, 칼라스를 위해 이 밀폐된 문을 활짝 열어 준 것이 토스카니니였기 때문이다.
칼라스의 평생에 걸친 가장 원대한 꿈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봉 밑에서 노래하는 것이었다. 칼라스는 이 위대한 지휘자를 숭배했으며, 단순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나곤 했다. 훗날 그녀는 토스카니니와의 짧은 만남을 자주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사실 칼라스는 뉴욕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소녀 시절부터 토스카니니를 숭배했다. 그녀는 라디오를 통해 그가 지휘하는 음악을 들었고, 그가 지휘한  옛날 레코드도 몇 장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찬탄이 정점에 달한 것은 이탈리아에 건너와 그녀의 중요한 이력이 시작되고부터였다. 자신의 레퍼토리가 확장되고 새로운 마에스트로들과 작업하게 됨에 따라 그녀는 점차 더욱 광적으로 완벽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든 지휘자들이 저마다 그녀에게 제공하는 최선의 것을 흡수했지만, 아무도 전적으로 그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좀 더 나은 무엇인가를 열망했다. 그리고 오직 '숭고한 노장'인 토스카니니만이 이 같은 그녀의 열망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뉴욕에 있을 당시 칼라스는 토스카니니를 위해 노래하고 싶은 갈망에 못 이겨 친구인 베이스 가수 니콜라 모스코나에게 토스카니니와의 오디션을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칼라스의 사촌으로 그녀의 전기를 쓴 스티븐 리나키스에 의하면, 그 때 모스코나는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무명의 소프라노는 토스카니니와의 오디션을 청할 수 없는 거요" 라고 그녀의 청을 일소해 부쳐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그는 완전히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칼라스의 필생의 꿈은 오랫동안 망상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전혀 예기치 않게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더니 그것은 곧 현실로 되었다. 이것은 칼라스의 삶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었다
.
1948-50
년에 걸쳐 마리아 칼라스가 승승장구의 이력을 쌓는 동안 공연이 끝날 때마다 예외 없이 그녀의 분장실은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이 쇄도했고, 꽃다발을 가져오거나 단순히 그녀의 손에 키스하고 싶어 몰려드는 찬미자들로 붐볐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칼라스를 거의 종교적으로 따라다니는 열광적인 숭배자가 있었는데, 그는 파르마 출신의 지주며 사업가인 루이지 스테파노티였다. 가수인 아내를 수년 전 사별한 그는 열광적인 오페라 광으로 음악계 인사들과 교분이 넓었으며, 특히나 토스카니니 집안에 무시로 드나드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칼라스 부부는 스테파노티와 곧 친구가 되었는데, 마리아를 토스카니니에게 소개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테파노티는 토스카니니에게 자주 마리아 칼라스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언젠가 메네기니 부부를 토스카니니에게 소개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1950 9월에 마침내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
1951년은 베르디의 사망50주기가 되는 해로서 토스카니니는 베르디의 고향인 부세토에서 라 스칼라에 의해 공연되는 그의 오페라를 가지고 경축행사를 치르고 싶어 마땅한 예술가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파노티는 이 사실을 메네기니에게 편지로 알렸고, 그로부터 1주일 뒤에(922) 토스카니니의 딸 왈리가 서명한 전보가 마리아 칼라스 앞으로 도착했다.

"저의 아버지는 밀라노의 둘리니가 20번지의 자택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떠나시는 28일 이전에 당신이 편리한 어느 때든지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칼라스는 27일 오후 내내 시간을 내겠다는 전보를 보낸 후 메네기니와 함께 밀라노로 갔다.

"마리아는 여행 동안 줄곧 신경과민이 돼 있었다. 이것은 그녀에겐 전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나는 많은 중요한 약속에 수많이 그녀를 동반했지만 언제나 그녀는 완전히 느긋하고 침착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몹시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토스카니니를 위해 노래한다는 것뿐 아니라 단순히 그녀가 무한한 칭찬을 바치고 있는 이 희유한 예술가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극히 불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메네기니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토스카니니는 그 때 이미 83세였지만 정력은 조금도 감퇴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정중히 맞아 들여선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주로 메네기니를 향해 칼라스의 이력에 관련해서 꼬치꼬치 질문을 했는데, 사실 토스카니니는 그 모든 것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
다만 한 가지 그는 어째서 칼라스가 여태까지 라 스칼라와 계약을 하지 않았는가를 이해 못했다. 1950, 칼라스는 라 스칼라의 <아이다>에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해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스칼라의 독재적인 관리인 안토니오 기링겔리는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냉담했으며, 이탈리아의 모든 지역에서 그녀의 성가가 날로 올라가고 있었음에도 그에겐 마친 '칼라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라 스칼라의 여왕 격인 레나타 테발디의 절대적 지지자로 지독한 쇼비니스트였던 기링겔리는 뒷날 문자 그대로 칼라스에게 무릎을 꿇게 되지만, 칼라스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이탈리아 오페라 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할 만큼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부유한 피혁 가문의 귀족으로 1945-72년에 걸쳐, 건강 때문에 은퇴했을 때까지, 기링겔리는 라 스칼라를 전제 군주처럼 지배했다. 그는 음악엔 무식했으나 경영엔 천재였다. 그가 라 스칼라를 관리한 시기에 이 오페라 극장은 너무나 영광을 누렸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이야기할 땐 '기링겔리 시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당신은 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찾고 싶었던 인물이요"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메네기니가 기링겔리의 칼라스에 대한 냉담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노골적으로 경멸해서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식사가 끝난 뒤 토스카니니는 비로소 마리아를 초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생전에 한번도 베르디의 <멕베스>를 지휘해 보지 않았소. 레이디 멕베스의 배역을 해석할 수 있는 소프라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이 배역은 베르디에겐 특히 소중한 것이었소. 그 자신 그의 레이디 멕베스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편지에서 <나폴리인 대본가 살바토레 카마리노에게 쓴) 밝히고 있어요 - "나는 레이디 멕베스가 못생기고 사악하기를 원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무겁고 짓눌린데다 어두운 것이어야 하오'라고 - 나는 이와 같은 자질을 지닌 소프라노를 결코 찾아내지 못했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신은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일 것 같아 직접 당신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이곳으로 청했던 거요. 만약에 당신이 그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한 대로라면 우린 <멕베스>를 공연할 수 있소. 나는 이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은 채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는 피아노 앞으로 가 <멕베스>의 스코어를 펼쳐 연주하기 시작했다. 칼라스는 그의 곁에서 서 노래했다. 그녀의 얼굴은 목소리와 더불어 가사의 내용을 기가 막히게 반영했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1막 거의 전부를 내리 연주했다. "주의를 온통 그와 같은 자력으로 가득 채우는 이처럼 강렬한 기분을 나는 정녕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거의 두려움에 싸여 구석자리로 움츠려 들고 말았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하찮은 것처럼 보였다" 라고 동석했던 메네기니는 쓰고 있다.
토스카니니는 돌연 노래를 중단시키고는 말했다. "당신은 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찾고 싶었던 여성이오. 당신 목소리라면 이용할 수 있겠소. 나는 당신과 함께 <멕베스>를 공연하겠소. 내일 나는 기링겔리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그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리다" 마에스트로는 거침없이 만족을 표시했다. 그의 얼굴은 환히 빛났고 칼라스는 거의 황홀해 했다. 그런 다음 토스카니니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미 플로렌스에서 <멕베스>를 공연하는 관계로 시실리아니와 만났다는 걸 알아요. 나의 제의는 그 계약을 받아들이는 걸 배제한다는 걸 이해하겠지요
?"
"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어떤 계약도 거절할 용의가 돼 있어요" 칼라스의 대답이었다
.
베로나로 돌아오면서 칼라스는 남편에게 말했다. "과연 <멕베스>가 공연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건 문제가 아네요. 오늘 나는 밀라노에서 체험한 일 때문에 무한히 행복할 뿐이에요
.
칼라스가 염려한 대로 과연 토스카니니의 <멕베스>는 공연되지 못했다. 토스카니니의 <멕베스>는 공연되지 못했다. 토스카니니는 약속한 대로 곧장 기링겔리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했고, 기링겔리는 곧 칼라스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는 않았다. 뉴욕에서 토스카니니는 밀라노의 딸과 아들을 통해 <멕베스>의 공연계획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써 보냈으며, 공연의 재정적 뒷받침도 확보되었지만, 부세토의 <멕베스>계획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니니는 모종의 라 스칼라를 둘러싼 음모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회유한 예술가의 필생의 꿈 - 멕베스를 죽기 전에 반드시 지휘하겠다는 토스카니니의 꿈과 생전에 어떻게든 토스카니니의 지휘봉 밑에서 노래해보겠다는 칼라스의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서 정식 데뷔한 1952년의 두 번째 시즌에 빅토를 데 사바타의 지휘로 칼라스는 <멕베스>에 출연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상대역인 멕베스는 엔조 마케리니였다
.)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토스카니니의 열띤 관심은 밀라노의 음악계와 대중 사이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결국 머지 않아 기링겔리는 칼라스 앞에 '엎드려' 라 스칼라의 문을 활짝 열어 주게 되었으니, 칼라스의 삶에서 토스카니니와의 만남은 정녕 위대한 은총이었던 셈이다.

1955 4월에 라 스칼라에서 공연된 칼라스 출연의 <라 트라비아타>는 오페라의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기념비적인 공연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마리아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서 비올레타로 출연하기 위해선 믿을 수 없을 만큼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라 스칼라의 데뷔는 반드시 <라 트라비아타>라야만 된다'는 일념을 가진 칼라스가 그토록 완강하게 밀고 나가지 않았던들, 적어도 라 스칼라에선 칼라스의 비올레타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라 스칼라의 전제적인 관리인 기링겔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칼라스에게 비올레타 역만은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리아 칼라스와 <라 트라비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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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에서 대부분의 승리는 라 스칼라의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녀 자신이 이 극장을 자신의 예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마리아 칼라스는 195112 7,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로 라 스칼라에 데뷔한 후, 1962 <메데아>에 최후 출연을 했을 때까지 만10여 년 동안 총 182회 공연에 23개 배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라 스칼라의 디렉터 기링겔리와 칼라스의 관계는 애초부터 기링겔리의 칼라스에 대한 거부감이 기초가 돼 있었다. 칼라스가 자신의 오페라단에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거의 3년 동안 그는 칼라스를 객원이 아닌 정식 단원으로 계약하기를 거부했다. 칼라스의 어떤 전기 작가도 기링겔리의 이 같은 적의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순전히 이탈리아 가수들을 선호한 그의 광적인 애국주의(쇼비니즘)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
그러나 죽기 얼마 전 기링겔리는 어느 인터뷰에서 1950 4월 마리아 칼라스가 레나타 테발디 대역으로 라 스칼라에서 <아이다>에 객원 출연했을 당시, 자신이 칼라스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공연 뒤 그녀를 식사에 초대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
1950
년은 레나타 테발디가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칼라스의 공연을 실패로 이끌려는 적의에 찬 시도를 암시하는 일들이 있었지만(이를테면 칼라스가 분장실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특별 주문한 아이다의 의상을 발견했는데, 가발은 겨우 어린 아이에게나 맞을 만한 것이었다. 다행이 암네리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페도라 바르비에리가 아이다의 의상 두벌(하나는 자신의 것, 하나는 극장 소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한 벌을 빌려 위기를 모면했다.), 그 같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연은 훌륭했고 관객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리아 ', 나의 조국이여'가 끝날 즈음 관객들이 마지막 박수를 치기 시작했을 때 칸막이 좌석 어디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고함을 쳤다. 이 경고는 감히 오랫동안 갈채를 계속할 수 없게 했다
.
게다가 공연이 끝난 뒤 극장 측에선 아무도 칼라스를 축하해 주기 위해 무대 뒤로 오지 않았으며, 기링겔리는 명백한 악의로써 그녀를 무시했다. 마리아의 분장실에서 기링겔리를 기다리고 있던 메네기니는 틀림없이 그가 올 것이라면서 "그가 뭐라고 말할지 두고 봅시다"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따금 나는 문으로 가서 바깥을 엿보았다. 마침내 그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의 방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방 앞을 지나면서 그녀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바로 곁방인 바리톤 데 팔키의 분장실 앞에 멈추어 서서는, 마리아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좋아, 좋아, 그대는 다시 한번 훌륭하게 해치웠어'라고 떠들어댔다'라고 메네기니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칼라스에 대한 라 스칼라 디렉터의 적의

기링겔리의 칼라스에 대한 거부감은 1951 1월에 메노티의 오페라 <집정관>을 라 스칼라에서 상연하기로 결정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메노티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토스카니니는 그에게 칼라스를 추천했다. 메노티는 밀라노에 가서 칼라스를 포함한 여러 소프라노들을 오디션한 뒤 칼라스가 가장 적임자라는 판단을 했다. 그는 기링겔리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소프라노를 찾아 냈는데 그 이름은 마리아 칼라스라고 했다.
기링겔리의 대답인즉 이랬다
.
"
마리아 칼라스라고요? , 하나님! 안돼요. 절대, 절대로, 안돼요
!"
"
하지만, 들어봐요. 당신은 약속하기를 내가 할 수 있다고
...."
메노티는 항의했다
.
"
당신이 선택하는 어떤 가수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지요. 하지만 이 극장에선 마리아 칼라스는 안돼요. 오직 그녀가 객원 예술가로 올 때만 가능해요
"
그래서 메노티는 칼라스에게 이 뜻을 전했다
.
"
정규 단원이 아니고는 결단코 라 스칼라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어요
"
칼라스의 대답이었다
.
메노티는 칼라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헤어지면서 칼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메노티씨, 당신께서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즉 나는 라 스칼라에서 노래할 것이고, 기링겔리는 그의 여생 동안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
칼라스의 예언이 들어맞았음을 이후의 사실이 증명하게 된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 입성한 바로 첫날부터 두 사람 사이엔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것은 기링겔리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
마리아 칼라스가 예술적 명성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확고해진 1951년 중반쯤엔 기링겔리도 칼라스의 예술적 자산으로서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즉 그녀와 부딪히든가 그렇지 않으면 오페라 계의 주류에서 단절되는 위험을 감수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는 칼라스와 제휴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길리 되리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후원해 온 몇몇 예술가들을 탈락시키고, 칼라스 앞에 달려가 마침내 "꿇어 엎드리기로' 결심했다
.

"<
라 트라비아타>없는 라 스칼라엔 흥미 없어요"

기링겔리는 냉정하고 유능한 책략가로서, 그의 가장 탁월한 재능은 가장 상서로운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가를 알아 내서 그 방향으로 곤두박질치듯 내달리는 것이었다. '만약에 기링겔리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면 그는 가장 헌신적인 구두닦이 소년이 된다. 만약에 그에게 당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다면 그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무자비하게 당신을 내팽개쳐 버린다. 만약에 전쟁 후 라 스칼라를 거쳐간 그 모든 예술가들이 말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폭로되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칼라스는 기링겔리의 인간됨을 가차없이 단죄하고 있다.
이러한 기링겔리였으니 만큼 바람이 바야흐로 칼라스 쪽으로 가장 상서롭게 불고 있음을 안 이상 그녀를 놓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51 5월 플로렌스에서 칼라스가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 출연한 후 기링겔리는 칼라스를 찾아와 라 스칼라의 다가오는 1951-52년 시즌을 칼라스의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로 개막하자는 제의를 했다. 또한 그는 같은 시즌을 위해 <노르마>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돈 카를로>도 제안했다
.
이 당시에 이미 칼라스의 <노르마>는 특히 명성이 있었고, 사실상 노르마 역엔 그녀에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비올레타 역시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배역임을 알고 있었다. 1951 1월에 플로렌스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대성공을 거두었던 칼라스는 바로 이 오페라로써 라 스칼라에 데뷔하기를 원했다. 소프라노에게 지극히 매혹적인 비올레타 역은 사실 극도로 까다로운 배역이기도 한데, 참으로 이 역을 훌륭히 해내려면 세 가지 다른 목소리를 능란하게 구사해야 하는 것이다. 칼라스의 가장 유명한 적수인 레나타 테발디조차 라 스칼라에서 이 오페라로 전적인 성공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칼라스가 특별히 <라 트라비아타>로써 라 스칼라에서 자신의 명성을 확립하고 싶어하는 것은 명백했다
.
그러나 여태까지 테발디를 후원해 온 기링겔리로선 테발디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이 오페라를 칼라스에게 제시할 수는 없었다. 칼라스는 자기가 가장 흥미를 갖는 오페라는 <라 트라비아타>라는 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장기인 <노르마>를 포기하더라도 그대신 비올레타 역으로 출연하고 싶어할 정도였다. 요컨대 칼라스는 <라 트라비아타>가 없다면 라 스칼라의 시즌은 그녀에게 별 흥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
이렇게 해서 결국 첫 번째 회동에선 명백한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10 2일 기링겔리는 라 스칼라의 행정관인 올다니와 변호사를 대동하고 다시 칼라스를 방문해서 정식 계약을 하고자 했다. 기링겔리는 우선 돈 얘기로 회담을 시작했는데, 칼라스는 즉각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
"
당신의 제의는 정말 반가워요. 라 스칼라에서 노래하는 것은 나의 목표 중 하나였어요. 그러나 <라 트라비아타>가 없다면 흥미 없어요. 적어도 이번 시즌엔 그래요. 따라서 다른 문제들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라 트라비아타>문제부터 해결합시다
"

기링겔리는 너무나 놀라 벙어리처럼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스칼라 시즌의 개막일 밤을 포함하는 계약 제의에 가수 측에서 특별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최초의 경우였을 것이다. 칼라스의 태도는 기링겔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 예술가는 감언이설로 속여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에게 경고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
짧은 침묵 뒤에 기링겔리는 어떻게든 칼라스의 <라 트라비아타>를 포기하도록 칼라스를 설득하려는 대화를 계속했고, 동석한 올다니도 이에 합세했다. 칼라스는 두 사람이 지칠 때까지 역설하도록 조용히 경청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안하고 있는 것이 매우 드문 기회이며, <라 트라비아타>없이도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
좋아요. <라 트라비아타>가 불가능 하다면 이 얘기는 내년에 계속하기로 해요. 여러분은 밀라노에서 할 일이 많을 텐데 나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를 원치 않아요
"
이렇게 칼라스는 결론 지었다
.
그들 셋은 일어섰다. 기링겔리 일행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혼란된 얼굴로 칼라스를 따라 문 앞으로 가 작별을 고하고는 거의 비틀거리며 떠났다. 메네기니는 둘만 남자 아내에게 말했다
.
"
당신이 이 기회를 붙잡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생각해
"
"
나는 내 식으로 라 스칼라에 가기를 원해요
"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중단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10분도 되지 않아 벨이 울리더니 기링겔리와 두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
"
숙고해봤는데 아무래도 우리극장에서 이 시즌을 열 사람은 당신이 돼야 할 것 같소. 우린 최선을 다 하겠소. 물론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하는 것에 대해서도
"
기링겔리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 다시 계약 조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4
년 후에야 무대에 오른 <라 트라비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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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링겔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리허설 하고 있는 동안 줄곧 칼라스는 <라 트라비아타>문제를 꺼냈으나, 기링겔리는 단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개막 공연 날(1951 12 7)엔 밀라노 사교계의 모든 인사가 라 스칼라에 출석했다. 미국과 유럽의 도시에서도 팬들과 전문가들이 달려왔다. 성공은 폭발적인 것이어서 칼라스는 대번에 라 스칼라의 새로운 여왕이 되었다. 기링겔리는 이 눈부신 성공으로 칼라스가 <라 트라비아타>건을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칼라스는 1952 1월이 되자 메네기니에게 <라 트라비아타>가 없다면 <노르마>에도 출연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기링겔리에게 보내도록 했다. 편지를 받은 기링겔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위기를 적당히 넘기려고만 했다. 참다 못한 칼라스는 마침내(1 13) 메네기니를 동반하고 기링겔리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우스꽝스런 핑계를 대며 어물어물 넘어가려던 기링겔리는 할 수 없이 진심을 털어놓았다
.
"
이 문제를 계속 얘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오. 우린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할 수 없어요
"
칼라스의 화가 폭발했다
.
"
그렇다면 당신은 애초부터 나를 속인 거예요
"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전적으로 기링겔리에게 다가갔다
.
"
당신이 우리 집을 방문했던 10월에도 확실히 당신은 이 오페라를 상연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거죠.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어요. 나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서 노래하도록 하기 위해 내게 거짓말을 했던 거예요
"
기링겔리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
"
고정하세요.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제발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내게 말해주세요
"
<
노르마>의 공연은 대대적으로 예고되었으며,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이후 칼라스가 출연하기로 예고된 다른 오페라에 대해서도 극장 측에선 엄청난 광고비를 지출한 터였다. 다행히 메네기니가 끼어들어 사태를 무마시켰다
.
"
잘못은 당신에게 있으니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제시해 보시죠
"
그래서 기링겔리는 칼라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
"
다음 시즌에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어울리는 장대한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하기로 약속하지요. 금년에 이 오페라가 공연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정규적 출연료를 지불하기로 하겠어요
"
그는 <라 트라비아타> '공연되지 않은 4회 출연료' 40만 리라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당시 칼라스의 1회 공연 보수는 35만 리라였다
).
이렇게 해서 칼라스는 예정대로 <노르마>에 출연했고, 말할 것도 없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와 그 외의 오페라들도 잇따라 공연되었으며 마침내 칼라스는 숙망의 라 스칼라를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다
.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가 비올레타로 스칼라의 무대에 서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였다. (<라 트라비아타> 1955년 봄 시즌 때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루키노 비스콘티 연출로 공연되었는데, 알프레도 역엔 스테파노, 제르몽 역엔 에토레 바스티아니니가 출연했다. 프랑코 제피렐리는 이 공연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칼라스를 주연으로 <라 트라비아타>를 영화화 할 계획을 품고 수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설득했으나, 결국 실현을 보지 못했다
.)
한 어리석은 디렉터의 농간으로 하마터면 세계는 오페라 사에 빛나는 역사적인 <라 트라비아타>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될 뻔했던 것이다
.

수수께끼의 죽음

마리아 칼라스는 1977 9 16일 아직도 비교적 젊은 나이인 54세에 타계했다. 그녀의 죽음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보다 불과 몇 년 앞서 1973-74년에 걸쳐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세계 순회연주를 했을 때 그녀의 노래를 들었던 팬들에겐 칼라스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욱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 세기적 소프라노의 급사를 알리는 텔레비전에선 무척 이상한 보도를 했던 것이다. 즉 칼라스의 사망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갔지만 아무도 그녀의 유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칼라스와 가장 가까웠던, 가장 오랜 친구인 스테파노 조차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칼라스가 파리의 아파트에서 죽었을 당시, 남편 메네기니는 심장병으로 입원했다 퇴원한 후 요양 중이었는데, 의사들의 만류로 장례식에 갈 수 없게 되자 칼라스에게 대단히 헌신적이었던 자신의 하녀 엠마의 친한 친구였던 칼라스의 하녀 브루나는 파리에서 전화로 엠마를 오지 못하게 했다
.
"
유체를 보는 건 불가능해. 오지 말아요. 살았을 때의 그녀를 기억하도록 해요
"
후에 파리로 간 메네기니는 브루나로부터 칼라스가 죽게 된 경위를 자세히 들었다. 마리아는 목욕을 한 뒤 침실로 가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죽었다. 그날 아침 마리아는 아침식사를 했는데, 나중에 목이 탄다면서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했다. 브루나는 욕실로 주스를 갖다 줬고 마리아는 그걸 단숨에 마셨다. 브루나가 부엌으로 돌아왔을 때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달려와 본즉 마리아는 의식을 잃고 마루 위에 쓰러져 있었다. 브루나는 다른 하인, 즉 페루치오를 불렀다. 그리고 둘은 함께 주인을 침실로 옮겼다. 그들이 그녀를 침실로 눕혔을 때, 이미 그녀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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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투성인 칼라스의 죽음.... 칼라스는 자살했는가?

칼라스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검시가 있을 법했지만, 친척 중 아무도 그걸 요구하지 않았고, 하물며 검시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9 19일 화요일이었다. 시체는 파리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로 운반되었다가 거기서 공동묘지로 갔는데, 장례식을 어찌나 서둘러 처리했던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인 듯 했으며, 누구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는 노여움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시체는 매장하지 않고 화장으로 처리했다. 후에 마리아 칼라스의 무덤을 방문한 메네기니는 묘지 관리인에게 대체 누가 화장을 지시했냐고 물었다. 그는 당시의 기록이 있는 장부를 메네기니에게 보여 주었다. 마리아의 관을 들고 온 사람에게 당시 관리인은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
.}
"
어느 편으로 할까요
?"
"
화장으로 해주시오
"
이게 대답이었다
.
"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
"
장 루앙 이라고 합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친척 중에서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
그리고 통상 시체가 도착한 다음날 화장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마리아의 시체를 즉각 화장했다는 것이었다. 관이 묘지에 도착한 지 30분만에 그녀의 시체는 재로 변했다고 관리인은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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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기니에 의하면, 마리아 칼라스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았다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칼라스는 극도로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생활의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조직적으로 영위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메네기니와 함께 살 동안 그녀는 자주 그에게 만년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과 매장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그녀는 당시 두 사람이 가장 아늑한 둘만의 생활을 즐겼던 별장이 있는 북 이탈리아의 휴양지 시르미오네의 관청에 가서 두 사람의 무덤을 위한 땅을 사두자고 끊임없이 졸라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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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죽은 뒤에도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있자고 했다. 메네기니가 일에 쫓기느라 바빠 그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부부싸움까지 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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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유언에 관해서 말하자면, 생전에 그녀는 지극히 뚜렷한 생각을 토로하곤 했다. "우린 아이가 없으니까 우리의 재산을 암 연구협회에 기증하면 근사할 거예요. 이 무서운 병은 어느 날엔가는 의사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정복될 거예요. 그러니 나는 이들의 투쟁을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편에게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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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년 칼라스가 스테파노와 더불어 세계 순회연주를 했던 기간에도 그들이 밀라노에서 암 치료협회의 환자들을 위한 사적 연주회를 가졌던 걸 보면 칼라스가 옛날에 품었던 계획이 변치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 어떤 문서상의 유언도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에 관련해서 메네기니는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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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마리아가 꿈 속에서 나를 찾아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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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스타, 유언을 기억하세요
"
그녀는 이 말을 세 번 되풀이했다. 마치 내 마음 속에 새겨 두고 싶어하는 듯이. 나는 잠에서 깨서 꿈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자문하고선 별별 추측을 다 해보았다. 마침내 나는 수년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이 기억났다. 마리아와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떤 서류에 서명하기 위해 우리의 변호사(당시는 트라부키였다) 사무실로 갔는데, 트라부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
"
두 분은 끊임없이 여행을 하시지요? 혹시 두 분은 각자가 다른 쪽을 수익자로 지정하는 유언을 만들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나요? 물론,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어떤 사고가 생긴다면 적어도 살아 남은 사람은 어떤 재정적 걱정은 없어야지요
"
"
당신 말이 맞아요" 라고 마리아는 말했다
.
"
우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생각이예요. 지금 아예 일을 처리하지요
"
나는 한 장의 백지에다 트라부키가 부르는 대로 받아 썼다.

'내가 죽게 되면 모든 것을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에게 남긴다'

그리고 서명했다. 마리아 역시 그렇게 하고서 우리는 두 장의 서류를 트라부키에게 맡겼다.
이 일을 기억하자 나는 마리아가 말한 유언이 바로 이것일 것이라고 깨달았다. 만약에 다른 유언장이 없다면 이것은 아직도 효력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낸담? 벌써 20년이나 지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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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히 아무리 하찮은 일도 전부 기록해 두는 '메모광'이었던 메네게니는 혹시나 해서 다락 속에 있는 많은 서류 뭉치를 뒤지다 어떤 마분지 상자 속에서 기적적으로 당시의 기록을 찾아냈다. 그것은 1954 5 23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트라부키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는데다, 생전에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리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의 사후 그에게 속한 모든 서류는 그의 동업자들이 나누어 가졌는데, 메네기니는 54년 당시의 트라부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한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서류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확신하지만 찾아는 보지요"

변호사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이 또한 기적적으로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옛날 서류더미 가운데 무턱대고 집어 올린 첫 번째 서류 속에 마리아 칼라스의 유서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메네기니는 마리아가 죽은 지 한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서류를 지참하고 파리로 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유언 검인이 끝난 후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유산을 전부 차지하려는 그녀 모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6개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통렬한 법정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978 5월 마침내 쌍방은 유산을 동등하게 나누어 갖는다는 데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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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뒤 한 달 만에 조지 5세 호텔에서 파리 소재 칼라스의 아파트에 있는 가구, 잡기 등의 경매가 이틀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 때 메네기니가 터뜨린 감정의 폭발은 여러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이 같은 경매는 정말 치욕이요!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을 모욕하고 있소. 이런 일은 결단코 허용돼서는 안되는 거요"

따라서 이틀 간의 경매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매입한 사람은 바로 메네기니였다. 그는 자신이 칼라스와 함께 살던 시절 그녀에게 선물했던 대부분의 그림들을 포함해서, 그녀의 침대와 18세기 실크 카펫 등을 구입했다. 그는 마리아의 재산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추억을 간직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려고 했다. 메네기니의 꿈은 그들 부부가 마지막 결혼생활을 영위한 시르미오네에다 마리아의 기념물을 전시해 두는 '칼라스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계획을 완수하기 전에 그는 타계하고 말았다.
메네기니는 결국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죽었다. 그가 마리아의 모친과 유산을 나누어 갖게 됐을 때, 그는 아내의 서류들을 갖게 해달라고 했다. 혹시 그 속에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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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의 모든 것이 칼라스의 스튜디오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법원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몇 가지 물건 가운데 칼라스가 항상 침상 곁의 나이트 테이블 위에 두고 보던 기도서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기도서 속 어떤 페이지에서 메네기니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기록을 발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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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자살 암시하는 메모 남겨
 

그것은 런던 사보이 호텔의 머리 글자가 찍힌 푸른 종이었는데, 거기다 마리아는 연필로 몇 줄 적어놓고 있었다. 오른쪽 위쪽 구석에 이탈리아어로 '77년 여름'이라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이란 걸 뜻했다. 날짜 아래쪽엔 'A T'라 적혀 있었고 이것은 '티타(Titta)에게'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 T는 마리아가 남편 메네기니에게 편지를 쓸 때 통상 사용하던 약자였다(바티스타 메네기니의 애칭은 티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엔 다섯 줄로 된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었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이것은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의 제 4막에서 조콘다가 부르는 자살을 결심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 주는 이 아리아는 '자살(Suicidio)!'이란 한마디로 시작되는데 칼라스는 이 단어를 적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너무나 의미심장한 다섯 줄의 메모에 함축되어 있음직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추측을 하도록 유혹하는가? <라 조콘다>는 칼라스와  메네기니에겐 운명적인 의미가 있었다. 30년 전 그녀가 이탈리아의 무대에 처음 출연한 것이 이 오페라였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튼 것도 바로 이 오페라의 리허설 때였다. 또한 그녀가 1959 9월초에 남편을 버리고 오나시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을 때도 역시 <라 조콘다>를 레코딩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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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그녀는 여러 번 자살을 '생각'했음에는 틀림없다. 만년에 칼라스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절망적인 고독 속에서 살았다. 오나시스가 죽은 뒤로 그녀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았다. 때로 위대한 예술가들이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달리 마리아 칼라스는 천성적으로 고독을 두려워했다. 메네기니와 함께 살 당시에도 칼라스는 혼자 있는 걸 싫어해서, 언제나 남편을 침실 바로 곁 방에서 일하도록 설득했고, 공연 때 절대로 관객 석에 있지 말고 무대 뒤에서 자기와 가까이 있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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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그녀의 기질을 볼 때 만년의 고독은 진실로 그녀에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라스의 운전수 페루치오에 의하면 그녀는 그가 휴일인 일요일에도 자기 곁에 있게 하려고 온갖 책략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의 휴일계획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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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며칠 전 칼라스가 메네기니와의 공동의 친구 한 사람에게 털어 놓았다는 '진심'은 참으로 가슴을 치는 바가 있다.

"사는 시르미오네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모릅니다. 평생 나는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많은 과오도 저질렀어요.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죠"

이 말을 전해 주면서 친구들은 메네기니에게 먼저 행동을 취하라고 다그쳤다.

"마리아가 자존심이 강한 여잔 줄 알지 않소? 그녀가 먼저 화해를 청해 오리라곤 기대 말아요. 전화를 해요. 가서 그녀를 만나요. 두 사람은 다시 결합하게 되리란 걸 알게 될 테니"

그러나 메네기니 역시 노인의 완고함을 가지고 버티었다.

"이 집을 뛰쳐 나간 것은 그녀였소. 먼저 행동을 취해야 하는 쪽도 역시 그녀라야 지요"

만약에 두 사람 중 어느 하나라도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단순히 마음 속 진실의 명령의 따랐던들, 파국은 방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오페라 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세기적 소프라노도 인간적 외로움에는 그렇게 약했던 것이다.



출처 이덕희(음악동아) │ 작성자 최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