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10-10 18:07 / 한겨례21 / 정혁준 기자
플라자의 추억은 고집을 낳고, 낭인의 서운함은 변심을 낳는 게 세상사 이치인 것을
그는 재기발랄하다. 고매한 이상주의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되레 비판한다. 가혹한 시련을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갑옷 입고 ‘로시난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산초와 함께 편력의 길에 오른다. 재기발랄한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처럼. 바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보다 강 장관이 더 무섭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강 장관이 시장과 소통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기업 임직원들. 고환율 정책을 펴 서민물가를 부추기고 키코(KIKO) 사태를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민간연구소 연구원들. 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경제·경영학 교수들.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편다고 주장하는 진보 지식인들. 모두 강 장관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다.
강 장관도 이들을 이해 못한다. 그는 탁상머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는 경제정책을 편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몰라준다는 말이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은 강 장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많은 국민들이 강 장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한겨레21>이 나섰다.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국가적 중대 국면에서, 경제정책 수장에 관한 오해와 불통의 접점을 밝혀 이해와 소통이라는 대안을 내놓는 것도 언론의 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강 장관이 왜 고환율 정책에 집착하는지, 종합부동산세 폐지에 목을 매는지 그의 경험을 통해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 글의 제목은 ‘강 장관을 위한 변명’이 될 것이고, 여전히 그를 이해 못하겠다면 ‘강 장관의 헛발질’이 될 것이다.
환율은 주권이다
강 장관이 고환율(원화약세) 정책을 썼다고 하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원래 참여정부 때 너무 강했던 원화를 바로잡으려 한 것뿐이다. 강 장관은 9월24일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지난 3∼4년간 눌렸던 환율이 올해 들어 튀어오르는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책임은 전 정부에 있다는 말이다.
환율이 주권이라는 그의 생각은 체험에서 우러나왔다. 20여 년 전 미국 뉴욕의 추억 때문이다. 당시 그는 뉴욕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바로 플라자 호텔 옆 호텔에서 ‘플라자 합의’를 지켜봤다. 1985년 9월22일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환율에 관한 합의를 발표했다. 달러 가치를 내리고 엔 가치를 높인다는 게 플라자 합의의 뼈대다. 당시 1달러당 250엔 하던 환율은 1년 뒤 1달러당 120엔대로 주저앉았다. 엔화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일본의 달러 대외 자산은 반토막이 났다. 일본 정부는 엔고에 따르는 불황을 막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썼다. 이 저금리 정책은 부동산 투기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했고 그 거품으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된다.
그 뒤 강 장관은 “환율은 정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환율주권론’을 확신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부터 강 장관은 강공 일변도의 고환율 정책을 썼다. 어떤 이들은 2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고 말한다. 누구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직 기획재정부 출입 기자는 이렇게 변론한다. “강 장관은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이 좋아)를 대단히 선호한다.”
환율주권 효과1: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
환율 방어로 정부가 ‘실탄’(외환보유액)을 너무 많이 써서 달러가 줄어들고 있다고 사람들이 주장한다. 강 장관의 ‘퍼주기식’ 외환보유고 관리에 우려의 목소리가 따른다. 정부 출범 초기 환율 정책 실패로 쓰지 않아도 될 외환보유액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는 거다.
강 장관은 대기업 수출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고환율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하반기에 들어 뒤늦게 물가안정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난 7월 한 달 새 100억달러가 넘는 금액이 외환보유액에서 빠져나갔다. 외환 현물시장과 스와프 시장에 쉼없이 달러를 풀었다. 반년 동안 줄어든 외환보유액은 모두 245억7천만달러다. 전체 외환보유액의 10분의 1에 이른다.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2600억달러가 넘었다. 9월 말 현재 2400억달러도 안 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외환보유액 금액 자체로는 작다고 볼 수 없다.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식의 인식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문제는 경제팀의 정책 혼선으로 환율이 과도하게 출렁거리고 있는 점이다. 외환시장이 환투기꾼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더 우려된다”고 말했다.
1992년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환투기꾼인 조지 소로스 때문에 거덜났다. 소로스는 당시 고평가된 파운드화를 지키려던 영란은행에 한 달 동안 총공세를 펼쳐 영란은행 외환보유액을 완전 바닥냈다. 결국 영란은행은 소르스에게 백기 항복을 해야 했다. 소로스는 한 달 새 가볍게 10억달러를 수중에 거머쥐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 상황에 쓰라고 쌓아놓은 게 외환보유액이다. 강 장관은 10월1일 당정 협의에서 “앞으로 외환시장에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투입해 안정시키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선제 대응이다. 그는 선제 대응을 잘했다고 이명박 대통령의 칭찬도 받았다.
환율주권 효과2: 키코 후폭풍
올 상반기 환율이 급격히 치솟았다. 그 사이 환율 헤지 상품인 키코 때문에 중소기업의 피해 사례가 불거졌다. 은행들은 지난해 원-달러 환율이 계속 떨어질 것으로 보고, 중소기업을 상대로 낮은 환율에서 키코 계약을 맺었다. 은행들은 정부 책임론을 얘기한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새 정부 출범 뒤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다. 정부의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으로 중소기업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장관이 키코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강 장관은 지난 4월 “은행이 잘 모르는 중소기업에 ‘환율이 더 떨어질 거다’라며 환율 헤징을 권유해 수수료를 받아먹는다. S기 세력(사기 세력)이다”라며 키코 사태의 책임을 은행으로 돌렸다. 다만 정부는 별일 아닌 것으로 처리했다. 중소기업의 ‘투기’ 행위를 정부가 구제해주는 것은 미국의 구제금융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환율은 또 올랐다. 중견업체 태산LCD가 흑자 도산을 했다. 은행 건전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 장관은 9월3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키코 피해 기업 신고를 받고 있으며 흑자 도산하는 기업은 나오지 않는 방향으로 한다”고 밝혔다. 10월1일 대책도 내놓는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중소기업 대출 보증을 약 2조5천억원가량 늘린다는 것이다. 국민 혈세가 투입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강 장관의 대대적인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이 받는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종부세는 질투의 경제학이다
“19세기 미국의 경제사상가 헨리 조지는 불후의 명저 <진보와 빈곤>에서 경제가 진보하는 속에 빈곤이 존재하는 이유를 토지소유의 불평등에서 찾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토지가치세(Land Value Tax)라는 단일세 제도를 제안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3월 <중앙일보>에 실린 ‘두 얼굴의 땅’이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강만수 당시 통상산업부 차관이다. 칼럼에서 그는 토지사유제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강 장관은 7년여 뒤인 2004년 11월17일치 <한국경제>에 ‘질투의 경제학, 종합부동산세’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강남에 눌러앉아 사는 사람들이 투기를 했나 가격을 올렸나? 이사하자니 무겁게 올린 양도소득세가 무섭고, 눌러살자니 종부세가 버거우니 어쩌란 말인가? 특정 지역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벼락 세금을 세금이라고 생각하나?”라고 주장했다.
두 얼굴의 강만수인가? 아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소신임이 틀림없다. 그는 비정규직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한 적도 있다. 강 장관은 2월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노무현 정부 시작할 때보다 (보유 중인) 아파트 가격이 3배 정도 뛰었다. 10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면서 소득은 없는데 종부세만 냈다”며 종부세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드러냈다.
강 장관은 10년 낭인 생활을 하며 부동산 정책에 대해 남다른 체험을 한 것 같다. 전직 재경부(현 기획재정부) 고위 간부의 회고다. “퇴임 뒤 재경부 고위 공무원들은 산하단체에서 보통 3~4탕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IMF 책임론 때문에 누구도 그를 챙겨주지 않았다. 강 장관은 딱 한 번, 그것도 차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일했을 뿐이다. DJ 정부와 그 뒤 참여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배신감이 크지 않겠나.” 그들이 만든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 또한 그러할 터다.
믿을 건 모피아뿐이다
지난해 대선 전 강만수 장관은 교수들로 둘러싸인 이명박 캠프에 혈혈단신 들어갔다. 하지만 끝내 교수 군단을 물리치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청와대엔 MB, 과천에는 왕(王)만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들어섰다.
곽승준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 등 교수 출신들이 포진돼 있던 이명박 캠프 안에서 그는 ‘고집불통’으로 불린 ‘왕따’였다. MB 캠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곽 전 수석과 강 장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곽 교수는 단계적인 것을 선호했다. 종부세 등 이전 정부가 법제화한 것들은 뒤집기보다 보완해나가는 쪽이었다. 하지만 강 장관은 747 공약처럼 한 번에 하자는 주의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번번이 부딪혔다.
지난해 7월 초 이명박 캠프는 조세개혁 방안을 발표하면서 국세인 종부세를 지방세인 재산세로 통합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강 장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즉각 참여정부가 “기존의 부동산 정책기조를 역행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 캠프는 곧바로 “종부세를 현행대로 유지”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곽 교수가 화를 냈고, 당시 이명박 후보도 강 장관을 질타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경제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므로 정권이 바뀌었다고 기존 정권의 정책을 쉽게 뒤집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 뒤 강 장관은 한나라당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하지만 당에서 살아남는다. 당에 수두룩한 재무부 출신 모피아(MOFIA·옛 재무부를 마피아에 빗댄 말)가 그를 보호해준 것이다. 촛불정국에서 곽 전 수석은 청와대에서 짐을 싸고 나와야 했지만 강 장관은 오히려 득세했다. 그 뒤 단행된 인사에서 모피아들은 당·정·청을 장악했다. 정부엔 강 장관(행시 8회·재경원 차관)이, 청와대엔 박병원 경제수석(행시 17회·재경부 차관)이 포진하는 체제로 개편됐다. 당에선 임태희 정책위의장(행시 24회·재경부 산업경제과장)―최경환 수석정조위원장(행시 22회·재정경제원 국고국 서기관) 라인에 재경부 정책홍보관리실장 출신의 유재한 전 주택금융공사 사장(행시 20회)이 정책실장으로 합류했다.
사실 교수 출신들은 관료의 맞수가 못 된다. YS 정부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박재윤 서울대 교수, DJ 정부 때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모두 모피아들에게 밀려났다. 모피아는 훈련받은 정책기술자들이다. 대통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모피아들은 수많은 공무원과 산하기관의 조직적 지원을 받아 자료와 정보를 독점한다. 대책도 쏙쏙 만들어낸다. 물론 모피아들은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지만.
747은 영원하다
강 장관은 미련을 못 버린다. ‘대한민국 747’(연평균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7대 경제강국) 공약에 관한 미련이다. 강 장관은 지난 3월 대내외 경제 여건이 나빠지고 있는데도 올해 성장률이 6% 안팎에 이를 것이라는 경제 여건과 동떨어진 전망을 제시했다. 하지만 강 장관은 10월1일 “올해 경제성장률이 4% 초반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다. 뒤늦게나마 현실을 직시한 것인데, 언론들은 정부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갉아먹었다고 깎아내렸다. 또 기획재정부는 9월30일 ‘2009년 예산안’을 내놓으면서 5% 성장률 달성을 전제로 예산안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간 경제연구기관들은 내년 성장률이 3% 후반대에 그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대통령도 미련을 못 버린다. 강 장관에 대한 미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6월 특별기자회견에서 강 장관의 경질과 관련해 “(문제가 있으면) 방향을 바꾸면 되고 책임을 맡겨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그때그때 바꿀 순 없다”고 오히려 강 장관에게 힘을 실어줬다.
대통령과 장관의 돈독한 신뢰의 출발은 언제부터일까? 만남은 소망교회였다. 1981년 당시 강 장관은 재무부 이재국 과장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둘 다 바쁜 때였다. 그러다 소망교회에 있는 ‘소금회’(소망교회 금융인 선교회)에 들어갔다. 소금회는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주축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멤버였다. 99년부터 두 사람은 급속하게 친해졌다. 동병상련의 심정 때문이었다. 강 장관은 IMF로 옷을 벗었을 때였다. 이 대통령은 당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힘들 때 친구가 오래가는 법이다.
강 장관은 고급 관료 출신이어서 경제정책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두 사람은 ‘대한민국 747’이란 대선공약의 청사진도 함께 그렸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신뢰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뢰가 계속될수록 시장과 국민의 신뢰는 멀어져가고만 있다.
사람들은 ‘강 장관이 도대체 위기 대응 능력이 있는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미 IMF 사태를 겪으면서 봤는데 더 이상 볼 것도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임면권’을 따지기 좋아하는 대통령만 위기 대처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만이다. 한 재경부 퇴임 관료는 “MB가 강 장관을 자르기 힘들 것이다. MB가 데리고 온 교수들을 다 내보냈기에 경제 문제를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에서는 현 경제팀이 좌충우돌하고 있으니 경제부총리제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부총리 1순위로 강 장관이 거론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경기를 부양할 때가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때다. 경제팀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하준경 한양대 교수)라고 권한다. 그러나 강 장관은 현실과 동떨어지더라도 자신의 신념인 성장지상주의를 현실에 적용하려 애쓰고 있다. 성장 조급증이 ‘파생상품’이 되어 환율정책 혼선과 키코 사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더라도 그는 앞만 보고 박차를 가한다.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
플라자의 추억은 고집을 낳고, 낭인의 서운함은 변심을 낳는 게 세상사 이치인 것을
그는 재기발랄하다. 고매한 이상주의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되레 비판한다. 가혹한 시련을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갑옷 입고 ‘로시난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산초와 함께 편력의 길에 오른다. 재기발랄한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처럼. 바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보다 강 장관이 더 무섭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강 장관이 시장과 소통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기업 임직원들. 고환율 정책을 펴 서민물가를 부추기고 키코(KIKO) 사태를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민간연구소 연구원들. 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경제·경영학 교수들.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편다고 주장하는 진보 지식인들. 모두 강 장관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다.
강 장관도 이들을 이해 못한다. 그는 탁상머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는 경제정책을 편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몰라준다는 말이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은 강 장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많은 국민들이 강 장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한겨레21>이 나섰다.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국가적 중대 국면에서, 경제정책 수장에 관한 오해와 불통의 접점을 밝혀 이해와 소통이라는 대안을 내놓는 것도 언론의 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강 장관이 왜 고환율 정책에 집착하는지, 종합부동산세 폐지에 목을 매는지 그의 경험을 통해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 글의 제목은 ‘강 장관을 위한 변명’이 될 것이고, 여전히 그를 이해 못하겠다면 ‘강 장관의 헛발질’이 될 것이다.
환율은 주권이다
강 장관이 고환율(원화약세) 정책을 썼다고 하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원래 참여정부 때 너무 강했던 원화를 바로잡으려 한 것뿐이다. 강 장관은 9월24일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지난 3∼4년간 눌렸던 환율이 올해 들어 튀어오르는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책임은 전 정부에 있다는 말이다.
환율이 주권이라는 그의 생각은 체험에서 우러나왔다. 20여 년 전 미국 뉴욕의 추억 때문이다. 당시 그는 뉴욕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바로 플라자 호텔 옆 호텔에서 ‘플라자 합의’를 지켜봤다. 1985년 9월22일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환율에 관한 합의를 발표했다. 달러 가치를 내리고 엔 가치를 높인다는 게 플라자 합의의 뼈대다. 당시 1달러당 250엔 하던 환율은 1년 뒤 1달러당 120엔대로 주저앉았다. 엔화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일본의 달러 대외 자산은 반토막이 났다. 일본 정부는 엔고에 따르는 불황을 막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썼다. 이 저금리 정책은 부동산 투기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했고 그 거품으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된다.
그 뒤 강 장관은 “환율은 정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환율주권론’을 확신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부터 강 장관은 강공 일변도의 고환율 정책을 썼다. 어떤 이들은 2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고 말한다. 누구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직 기획재정부 출입 기자는 이렇게 변론한다. “강 장관은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이 좋아)를 대단히 선호한다.”
환율주권 효과1: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
환율 방어로 정부가 ‘실탄’(외환보유액)을 너무 많이 써서 달러가 줄어들고 있다고 사람들이 주장한다. 강 장관의 ‘퍼주기식’ 외환보유고 관리에 우려의 목소리가 따른다. 정부 출범 초기 환율 정책 실패로 쓰지 않아도 될 외환보유액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는 거다.
강 장관은 대기업 수출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고환율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하반기에 들어 뒤늦게 물가안정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난 7월 한 달 새 100억달러가 넘는 금액이 외환보유액에서 빠져나갔다. 외환 현물시장과 스와프 시장에 쉼없이 달러를 풀었다. 반년 동안 줄어든 외환보유액은 모두 245억7천만달러다. 전체 외환보유액의 10분의 1에 이른다.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2600억달러가 넘었다. 9월 말 현재 2400억달러도 안 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외환보유액 금액 자체로는 작다고 볼 수 없다.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식의 인식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문제는 경제팀의 정책 혼선으로 환율이 과도하게 출렁거리고 있는 점이다. 외환시장이 환투기꾼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더 우려된다”고 말했다.
1992년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환투기꾼인 조지 소로스 때문에 거덜났다. 소로스는 당시 고평가된 파운드화를 지키려던 영란은행에 한 달 동안 총공세를 펼쳐 영란은행 외환보유액을 완전 바닥냈다. 결국 영란은행은 소르스에게 백기 항복을 해야 했다. 소로스는 한 달 새 가볍게 10억달러를 수중에 거머쥐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 상황에 쓰라고 쌓아놓은 게 외환보유액이다. 강 장관은 10월1일 당정 협의에서 “앞으로 외환시장에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투입해 안정시키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선제 대응이다. 그는 선제 대응을 잘했다고 이명박 대통령의 칭찬도 받았다.
환율주권 효과2: 키코 후폭풍
올 상반기 환율이 급격히 치솟았다. 그 사이 환율 헤지 상품인 키코 때문에 중소기업의 피해 사례가 불거졌다. 은행들은 지난해 원-달러 환율이 계속 떨어질 것으로 보고, 중소기업을 상대로 낮은 환율에서 키코 계약을 맺었다. 은행들은 정부 책임론을 얘기한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새 정부 출범 뒤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다. 정부의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으로 중소기업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장관이 키코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강 장관은 지난 4월 “은행이 잘 모르는 중소기업에 ‘환율이 더 떨어질 거다’라며 환율 헤징을 권유해 수수료를 받아먹는다. S기 세력(사기 세력)이다”라며 키코 사태의 책임을 은행으로 돌렸다. 다만 정부는 별일 아닌 것으로 처리했다. 중소기업의 ‘투기’ 행위를 정부가 구제해주는 것은 미국의 구제금융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환율은 또 올랐다. 중견업체 태산LCD가 흑자 도산을 했다. 은행 건전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 장관은 9월3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키코 피해 기업 신고를 받고 있으며 흑자 도산하는 기업은 나오지 않는 방향으로 한다”고 밝혔다. 10월1일 대책도 내놓는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중소기업 대출 보증을 약 2조5천억원가량 늘린다는 것이다. 국민 혈세가 투입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강 장관의 대대적인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이 받는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종부세는 질투의 경제학이다
“19세기 미국의 경제사상가 헨리 조지는 불후의 명저 <진보와 빈곤>에서 경제가 진보하는 속에 빈곤이 존재하는 이유를 토지소유의 불평등에서 찾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토지가치세(Land Value Tax)라는 단일세 제도를 제안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3월 <중앙일보>에 실린 ‘두 얼굴의 땅’이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강만수 당시 통상산업부 차관이다. 칼럼에서 그는 토지사유제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강 장관은 7년여 뒤인 2004년 11월17일치 <한국경제>에 ‘질투의 경제학, 종합부동산세’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강남에 눌러앉아 사는 사람들이 투기를 했나 가격을 올렸나? 이사하자니 무겁게 올린 양도소득세가 무섭고, 눌러살자니 종부세가 버거우니 어쩌란 말인가? 특정 지역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벼락 세금을 세금이라고 생각하나?”라고 주장했다.
두 얼굴의 강만수인가? 아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소신임이 틀림없다. 그는 비정규직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한 적도 있다. 강 장관은 2월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노무현 정부 시작할 때보다 (보유 중인) 아파트 가격이 3배 정도 뛰었다. 10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면서 소득은 없는데 종부세만 냈다”며 종부세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드러냈다.
강 장관은 10년 낭인 생활을 하며 부동산 정책에 대해 남다른 체험을 한 것 같다. 전직 재경부(현 기획재정부) 고위 간부의 회고다. “퇴임 뒤 재경부 고위 공무원들은 산하단체에서 보통 3~4탕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IMF 책임론 때문에 누구도 그를 챙겨주지 않았다. 강 장관은 딱 한 번, 그것도 차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일했을 뿐이다. DJ 정부와 그 뒤 참여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배신감이 크지 않겠나.” 그들이 만든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 또한 그러할 터다.
믿을 건 모피아뿐이다
지난해 대선 전 강만수 장관은 교수들로 둘러싸인 이명박 캠프에 혈혈단신 들어갔다. 하지만 끝내 교수 군단을 물리치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청와대엔 MB, 과천에는 왕(王)만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들어섰다.
곽승준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 등 교수 출신들이 포진돼 있던 이명박 캠프 안에서 그는 ‘고집불통’으로 불린 ‘왕따’였다. MB 캠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곽 전 수석과 강 장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곽 교수는 단계적인 것을 선호했다. 종부세 등 이전 정부가 법제화한 것들은 뒤집기보다 보완해나가는 쪽이었다. 하지만 강 장관은 747 공약처럼 한 번에 하자는 주의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번번이 부딪혔다.
지난해 7월 초 이명박 캠프는 조세개혁 방안을 발표하면서 국세인 종부세를 지방세인 재산세로 통합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강 장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즉각 참여정부가 “기존의 부동산 정책기조를 역행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 캠프는 곧바로 “종부세를 현행대로 유지”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곽 교수가 화를 냈고, 당시 이명박 후보도 강 장관을 질타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경제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므로 정권이 바뀌었다고 기존 정권의 정책을 쉽게 뒤집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 뒤 강 장관은 한나라당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하지만 당에서 살아남는다. 당에 수두룩한 재무부 출신 모피아(MOFIA·옛 재무부를 마피아에 빗댄 말)가 그를 보호해준 것이다. 촛불정국에서 곽 전 수석은 청와대에서 짐을 싸고 나와야 했지만 강 장관은 오히려 득세했다. 그 뒤 단행된 인사에서 모피아들은 당·정·청을 장악했다. 정부엔 강 장관(행시 8회·재경원 차관)이, 청와대엔 박병원 경제수석(행시 17회·재경부 차관)이 포진하는 체제로 개편됐다. 당에선 임태희 정책위의장(행시 24회·재경부 산업경제과장)―최경환 수석정조위원장(행시 22회·재정경제원 국고국 서기관) 라인에 재경부 정책홍보관리실장 출신의 유재한 전 주택금융공사 사장(행시 20회)이 정책실장으로 합류했다.
사실 교수 출신들은 관료의 맞수가 못 된다. YS 정부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박재윤 서울대 교수, DJ 정부 때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모두 모피아들에게 밀려났다. 모피아는 훈련받은 정책기술자들이다. 대통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모피아들은 수많은 공무원과 산하기관의 조직적 지원을 받아 자료와 정보를 독점한다. 대책도 쏙쏙 만들어낸다. 물론 모피아들은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지만.
747은 영원하다
강 장관은 미련을 못 버린다. ‘대한민국 747’(연평균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7대 경제강국) 공약에 관한 미련이다. 강 장관은 지난 3월 대내외 경제 여건이 나빠지고 있는데도 올해 성장률이 6% 안팎에 이를 것이라는 경제 여건과 동떨어진 전망을 제시했다. 하지만 강 장관은 10월1일 “올해 경제성장률이 4% 초반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다. 뒤늦게나마 현실을 직시한 것인데, 언론들은 정부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갉아먹었다고 깎아내렸다. 또 기획재정부는 9월30일 ‘2009년 예산안’을 내놓으면서 5% 성장률 달성을 전제로 예산안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간 경제연구기관들은 내년 성장률이 3% 후반대에 그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대통령도 미련을 못 버린다. 강 장관에 대한 미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6월 특별기자회견에서 강 장관의 경질과 관련해 “(문제가 있으면) 방향을 바꾸면 되고 책임을 맡겨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그때그때 바꿀 순 없다”고 오히려 강 장관에게 힘을 실어줬다.
대통령과 장관의 돈독한 신뢰의 출발은 언제부터일까? 만남은 소망교회였다. 1981년 당시 강 장관은 재무부 이재국 과장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둘 다 바쁜 때였다. 그러다 소망교회에 있는 ‘소금회’(소망교회 금융인 선교회)에 들어갔다. 소금회는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주축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멤버였다. 99년부터 두 사람은 급속하게 친해졌다. 동병상련의 심정 때문이었다. 강 장관은 IMF로 옷을 벗었을 때였다. 이 대통령은 당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힘들 때 친구가 오래가는 법이다.
강 장관은 고급 관료 출신이어서 경제정책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두 사람은 ‘대한민국 747’이란 대선공약의 청사진도 함께 그렸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신뢰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뢰가 계속될수록 시장과 국민의 신뢰는 멀어져가고만 있다.
사람들은 ‘강 장관이 도대체 위기 대응 능력이 있는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미 IMF 사태를 겪으면서 봤는데 더 이상 볼 것도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임면권’을 따지기 좋아하는 대통령만 위기 대처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만이다. 한 재경부 퇴임 관료는 “MB가 강 장관을 자르기 힘들 것이다. MB가 데리고 온 교수들을 다 내보냈기에 경제 문제를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에서는 현 경제팀이 좌충우돌하고 있으니 경제부총리제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부총리 1순위로 강 장관이 거론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경기를 부양할 때가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때다. 경제팀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하준경 한양대 교수)라고 권한다. 그러나 강 장관은 현실과 동떨어지더라도 자신의 신념인 성장지상주의를 현실에 적용하려 애쓰고 있다. 성장 조급증이 ‘파생상품’이 되어 환율정책 혼선과 키코 사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더라도 그는 앞만 보고 박차를 가한다.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