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 연행자들의 辯 ‘내가 거리에 나간 까닭’>
기사입력 2008-07-25 13:40 / 신동아 / 이혜민 기자
해묵은 한미 쇠고기 협상이 지난 4월17일 갑작스레 타결됐다. 그 즉시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온라인 모임이 결성됐고, 4월29일 MBC ‘PD수첩’에서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내보낸 뒤 서울 청계천 광장 앞에는 수많은 촛불이 등장했다.
5월2일에는 10대 청소년 등 1만명으로 구성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온라인 연합모임이 첫 촛불집회를 열었다. 며칠 후인 6일에는 온라인 모임과 시민단체 등 1500여 개로 이뤄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됐다. 17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5월24일,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던 시민 37명이 연행됐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후 첫 연행이었다. 이후 소화기, 물 대포를 사용한 강경진압이 시작되면서 연행자는 계속 불어났지만 촛불시위 참여자는 줄기는커녕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촛불은 정부가 5월29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고시’를 발표하면서 거대한 물결로 변했다. 이후 4일 동안 정부는 타오르는 촛불에 기름을 붓는 발언만 쏟아냈다. 6월3일 뒤늦게 ‘장관고시 무기한 연기’를 발표하고 미국 측에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출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성난 민심은 청계천과 시청, 광화문, 청와대 인근을 뒤덮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100일째 되던 6월5일부터 8일까지 72시간 동안 계속된 시위는 서울에서만 60만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8만명)이 참가한 ‘6·10 민주화항쟁 기념 촛불집회’에서 정점을 이뤘다. 촛불 집회의 주제는 ‘쇠고기 재협상’에서 ‘대운하 반대’ ‘민영화 반대’ ‘물가 문제’로 옮겨가며 ‘정권퇴진 운동’ 양상으로 확산된 상황이다.
사법연수원생도 연행?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시민들의 쌓여가던 분노는 대통령의 ‘배후설’ 발언에 완전히 폭발했다. 이 대통령이 “초를 누가 사줬는지 밝히라”는 데 화답하듯, 김경한 법무장관은 “뒤에서 종용하는 세력이 많다. 배후세력을 엄정히 처벌하라”고 지시했으며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위대의 경로를 볼 때 치밀한 계획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사정기관의 억측을 증명하듯 경찰은 현재까지 ‘윗분’들이 말한 ‘종용세력’이나 ‘배후세력’을 단 한 명도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 촛불시위 현장에선 “촛불집회의 배후자는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주장이 상식이 된 상태다.
청와대 진출이 시도된 5월24일부터 6월15일 현재까지 연행된 시민은 모두 585명. 검·경은 이 중 2명을 구속하고 50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56명을 즉심에 회부하고 20명은 훈방했다. 585명의 연행자 중에는 집회가 익숙한 시민단체 회원도 있고 대학생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소 정치나 집회엔 관심조차 없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과연 그들은 왜 경찰에 잡혀가는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촛불을 들어야 했을까. 또 그들이 손에 쥔 촛불을 좀처럼 놓으려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작정 거리로 나가 그들을 만났다. 연행됐다 풀려나온 시민 대부분이 꾸준히 촛불집회에 다시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행된 시민 30여 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대부분이 고사했다. “‘보수 언론 불매운동’을 하는 마당에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중에는 사법연수원생도 있는데, 그는 처음엔 연행 사실을 인정하고 “인터뷰를 고민해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엔 “그런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경찰도 그의 존재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결국 취재에 응한 연행 시민은 모두 8명. 이들 중에는 자신이 한 말이 기사에 잘못 반영될까봐 기자 모르게 대화 내용을 녹음하고, 이런 사실을 포털 다음의 ‘아고라 토론방’에 올린 사람도 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종로에서 수입 쇠고기 전문점을 하는 최모(40대)씨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아주 반가운 사람이다. 그는 평소 손님에게 “호주산, 캐나다산은 맛이 떨어지고 그나마 미국산이 한우와 맛이 비슷해 인기”라고 말해왔다. 뼛조각 발견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중단된 이후 수입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린 것도 그래서다. 그랬던 그가 돌연 시위에 참가했다가 연행까지 됐다. ‘30개월 이상 소처럼 문제가 많은 소를 수입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6월6일)도 그의 정육점을 다녀간 손님은 10명뿐. 기자를 보자 그는 “미국산 쇠고기가 나쁘다고 하니 사람들이 수입산 자체를 아예 안 찾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수입이 예전의 10분의 1로 떨어졌어요. 몇 달째 임대료도 못 내는 상황입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데 눈앞이 캄캄해요. 당장 한우를 갖다 팔기도 어렵습니다. 한우를 팔려면 새김질도 하고 부위 분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애초에 수입고기 다루는 걸 배워 기계로 써는 방법밖에 몰라서요.”
그는 5월25일 퇴근길에 광화문을 지나다 처음 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청계광장에서 대치 중인 시위대와 경찰의 중간지점에 서 있었다.
“시위대가 경찰에게 맞았다는 소식에 화가 치밀어 ‘스톱하라’고 그냥 소리만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잡혀갔어요. 연행된 후 배후가 있느냐고 경찰이 묻더라고요. 그때도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정말 쇠고기 문제 때문에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제대로만 수입하면 내가 거길 왜 갔겠습니까. 저는 컴퓨터 켜고 끌 줄도 몰라요. 사회활동이라고는 성당 레지오(기도모임) 활동밖에 한 게 없습니다.”
그는 떳떳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민변인지 민선인지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도 거부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사람 중 나만 거부했죠. 죄인이 아닌데 내가 왜 그런 도움을 받아야 합니까. 경찰이 수갑을 안 채운 것도 경찰이 나한테 죄가 없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 아닙니까. 저는 쇠고기 문제만 해결되면 집회에 다신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설비 사무소장을 맡고 있는 이영희(57·서울 강서구 가양동)씨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집회에 나온’ 생계형 연행자다. 6월1일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경찰에 붙잡혔다. 그전에도 서너 차례 촛불집회 구경을 한 적이 있다는 이씨는 “원자재 가격이 너무 뛰어 도저히 먹고살기 힘들어 집회에 나갔다”고 털어놨다. 그는 건축 기자재 구입이 어려워 일손을 놓고 있다. 건물 짓는 일을 하려면 파이프, 시멘트, 철근 등이 필요한데 값이 워낙 오르기도 했고 자재도 부족해 물건을 도통 구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약서 쓸 때 가격과 실제 견적서 낼 때의 단가가 다르니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손해를 보고 구입하려 해도 물건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주로 3층 이하의 작은 건물을 짓는 그에게 100만원의 손해는 곧 직원 한 사람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촛불집회에 나왔다. 좀 먹고살게 해달라고 외치려고.
“7% 경제성장 시킨다고 할 때가 언제인데 물가 오른 것 좀 보세요. 기름값 안 올리겠다고 했지만 감당 못하고 있고 소비자 물가는 13%나 올랐습니다. 라면, 음료수 같은 공산품은 20% 올랐고요. 꼭 통계치를 들이대지 않아도 장사하는 사람은 몸으로 느껴요.
더 두려운 건 민영화죠. 민영화 이후엔 물가가 더 오를 거예요. 의료보험 민영화다, 수돗물 민영화다, 가스 민영화다…모두 물가 올리는 것들 아닙니까. 수입 쇠고기 문제도 크지만 저는 민영화 이후 오를 물가가 걱정돼 나왔어요.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정책 전체가 잘못됐다는 거죠. 촛불집회 선동자는 시민이 아니라 대통령입니다.”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
김홍기(37)씨는 VIP 블로거다. 최근 ‘샤넬, 미술관을 가다’란 미술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하루 400~500명의 중·고등학생과 미술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멘토 생활도 하기 때문에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애들도 꽤 있다. 뉴욕이나 런던에서 미술 공부하는 ‘수양딸’도 여럿이다. e메일로 연락하는 친구도 있고, 소포로 과자를 보내주는 학생도 있다. 평범한 블로거이던 그가 집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부 언론과 단체들이 집회에 참가한 자신의 딸들을 ‘좌빨(좌익 빨갱이)’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 나는 컵라면을 먹으면 그만이지만 애들은 선택권이 없죠. 급식으로 나온 거 먹을 수밖에. 그런 애들이 안전한 음식 먹겠다고 길에 나왔는데 좌빨이라니…. 그애들은 ‘바이오폴리틱스’입니다. 생활정치인인 거죠. 그 여린 애들이 나가는데 당연히 나도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92학번인 그는 단 한 번도 집회에 참여한 적이 없다. 대학시절 틈만 나면 현대 발레 보러 다니고 미술관 다니느라 바빴다. 그는 학생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 나가서 세금 내는 시민이 됐을 때 국가에 얘기하고 싶어서”였다. 그런 그를 친구들은 ‘무개념’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가 5월25일 집회에 참가했다 연행되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놀랐다.
대통령이 다녔다는 소망교회에서 청년부 활동을 하는 그는 “이 대통령이 정말 백성을 섬기는 리더가 될 줄 알고 뽑았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며 “대통령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CEO일 수는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주식회사로 볼 수도 있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국민)가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베스터, 투자자인거죠. 그렇게 따지면 우린 대통령의 비전을 보고 대한민국 주식회사에 투자한 거죠. 선거를 통해서요. 주주들이 (경영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못 바꾸겠다’고 버티는 CEO가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신분 노출을 거부한 한 20대 회사원은 “애들도 나서는데 어른인 내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느냐는 심정으로 나갔다”고 했다. 그는 5월28일 새벽에 연행된 113명의 연행자 중 한 사람. 경찰의 진압 과정을 동영상으로 본 게 집회에 나간 계기가 됐다. 그는 흥분한 상태였지만 끝까지 ‘비폭력’을 외쳤다고 한다.
“전경이 시민을 방패로 찍는 동영상을 봤습니다. 그렇게 어린애들이 맞는 동영상 보고 누가 참겠습니까. 고등학생도 몸 바쳐 나가는데 (이들에게)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가 종로에 있어서 짬이 있을 때마다 나왔죠.”
공인중개사 우모(42)씨도 비슷한 이유에서 집회에 참가했다 연행됐다. 5월3일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집회에 나간다고 하기에 혹시 다치면 어쩌나 하고 따라나왔던 것. 집회에 나간 그는 ‘10대 소녀들이 어른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씨는 혼자 집회에 나왔다.
“다른 학교도 그렇지만 우리 딸도 학교에서 못 나가게 했습니다. 딸아이 자신도 혹 다칠까봐 나가지 않으려 하고요. 학교가 여중생 집회 참여에 대해 조직적으로 탄압하는 것 같습니다. 여의도의 한 학교에서는 집회에 참여하면 퇴학시킨다는 통신문이 돌았다고도 합니다. 교사들이 해산을 지도하러 나온 적도 있고요.”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거리로 나왔다.
“나는 쇠고기뿐 아니라 우리 농업 전체를 내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자체를 반대합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인 의료보험 민영화도 반대하고요. 수출을 위해 환율을 의도적으로 상승시키고 물가를 올린 정부의 꼼수도 싫습니다. 이명박 정권에는 기대하는 바가 아예 없습니다.”
“나라 망할까봐 나갔다”
순수하게, 오직 나라가 걱정돼 나온 사람들도 있다. 여객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선경숙(39·여)씨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자진해서 휴직계를 냈다. 그는 다니던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휴직계를 내고 호주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그곳에서 ‘나라 망하면 안 되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한다.
“호주에 가서 ‘너희 나라 망한 거 아니냐, IMF 체제에 있으면 한국은 끝장이다’라는 말을 듣고는 눈물이 핑 돌았어요. 나 자신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내 나라를 우습게 보니까 슬프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때 느낀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나라가 망하면 정말 나도 견딜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죠. ‘나랏님’이 나라를 잘 끌고 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다다른 것도 그때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별다른 사회참여는 하지 않았다. 나라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고, 투표하는 것도 여전히 싫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치인은 허가받은 사기꾼’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되나 저 사람이 되나 세상은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거리로 뛰쳐나왔다.
“나는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도 안 나왔고, 노무현 탄핵 반대할 때도 안 나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왔죠. 다른 나라에서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먹이지 않는 소를 우리한테 먹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미친 소 수입은 말도 안 되죠. GMO(유전자변형농산물) 옥수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자변형농산물이 미치는 파장이 얼마나 위험한데요. 우리가 무슨 실험대상입니까. 광우병 소도 소지만 이 틈을 타서 수도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에 더 큰 분노를 느낍니다.”
그는 첫 연행자가 발생한 5월25일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미친 소는 너나 먹어”를 외치다가 경찰에 붙잡혀 44시간 동안 갇혀 있다 풀려나왔다.
“집회에 참가한 학생 하나가 시위대 앞에 나와서 갑자기 부모님에게 고맙다는 거예요. 자기는 이민을 가게 됐다고 하면서요. 이렇게 국민의 건강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에 더 이상 살지 않게 돼서 너무도 다행이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참 착잡하데요. 하지만 모두 이 나라를 떠날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곳에서 살고 있고 또 이곳에 묻혀야 하고, 후손들도 있는데….”
그는 이런 생각을 품고 가능한 한 매일같이 집회에 참가한다고 했다. 한 달이 넘도록 집회에 참여하면서 생활도 엉망이 됐다. 그는 “매일 새벽까지 집회에 참여한 뒤 집에 가서 인터넷에 댓글을 달다 보면 내 생활이 불가능해진다”며 “얼른 시국이 안정돼 나도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고 싶다”고 호소했다
IT 계열 회사원인 김모(26)씨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지도자가 이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면 나라가 흔들릴 거라는 판단에서 거리로 나왔다고 한다.
“쇠고기 문제 외에도 너무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게 많아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죠. 민영화를 추구하는 데도 반감이 큽니다. 공기업이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회사인데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으로 만들면 물가가 오를뿐더러 그동안 혜택 받던 사람들은 돈을 더 낼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대통령은 온 국민이 반대하는 한반도대운하를 안 하겠다고 했는데, 국토해양부에선 또 추진한다고 하고…. 대통령을 신뢰할 수 없어요.”
인터넷 언론을 통해 그의 연행 사실(5월28일)이 알려지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영웅’ 대접했다. 그는 그런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단지 뜻이 있어 나갔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를 과대 해석했다. 그는 이후 집회엔 되도록이면 나가려 하지 않는다. 정 가고 싶으면 남들이 못 알아보도록 하고 나가서도 조용하게 앉아 있다 들어온다.
이유 없이 연행된 후 집회 참가
이렇듯 나름의 이유 때문에 거리로 나선 시민들도 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연행된 후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돼 촛불집회에 나온 경우도 있다. H대 건축학과에 재학 중인 허모(23)씨는 애당초 시위에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5월28일 군복무 중이던 친구가 휴가를 나와 종로에 놀러갔다 경찰에 연행됐다.
“친구랑 놀다가 집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시청 앞에서 전경들이 길을 터주기에 거기로 걸어가는데 잡아갔어요. 아무 이유도, 근거도 대지 않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토끼몰이 작전’라는 것이더군요. 경찰서에 연행된 후에도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어요. 같은 서에서 조사받던 사람 중에 저와 비슷한 사람이 둘 더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장애인이고 다른 한 명은 학원에 갔다가 집에 가던 사람이었죠.”
그는 연행된 후에 정부 비판론자가 됐다.
“해가 진 도로에서 집회를 하면 안 된다고해요. 상위법인 헌법이 국민의 의사 표현을 엄연하게 보장하고 있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집시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그의 정부 비판은 미국산 쇠고기로 확장됐다. 수십만명에 이르는 시민이 집회에 몰려드는 까닭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국가에서는 30개월 미만으로 통제하는데 우리만 이런 협정을 맺은 건 정말 굴욕적입니다. 척수 같은 위험 부위도 허용하고 말이에요. 협상 내내 위생조건, 검역조건 등을 따지지 않고 체결한 것도 문제죠. 결국 우리나라가 다른 많은 나라에 나쁜 선례를 남긴 셈이에요. 반면교사가 된 거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연행된 이들은 하나같이 이명박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연행된 후에 대부분 그 비판의 정도가 심해졌다. “쇠고기 문제만 재협상하면 된다”는 시민은 소수에 그치고 갈수록 “공기업 민영화와 한반도대운하도 철회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심지어 “정권이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다. 연행자가 많아지면서 점점 ‘정권퇴진’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시민도 늘어가는 형국.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반대로부터 시작한 촛불집회가 쉬 멈춰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촛불집회 참가자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정권 퇴진’ 요구하기도
“정부가 문제 없는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한다면 여기 올 이유가 없습니다.”(수입고기 정육점 운영 최씨)
“쇠고기 협상에 참여한 사람들이 협상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이명박 정부도 가스, 수도, 의료보험 민영화할 게 아니라 나라가 혼란해지지 않을 정도로 한두 가지만 바꾸겠다고 하면 안 나오겠습니다.”(건축업 이씨)
“대통령이 퇴진, 하야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대통령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국민들이 왜 들고일어났는지 핵심을 잡고 대응해야 합니다.”(IT 관련업 종사자 김씨)
“5월24일 전까지 제가 외치던 구호는 ‘고시철회, 즉각 재협상’이었죠. 그런데 경찰이 국민을 강경진압하는 광경을 본 이후부터는 ‘명박 탄핵’ ‘이명박 물러가라’ ‘독재타도’를 외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 대통령은 ‘민주사회의 지도자’라 할 수 없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퇴진시켜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 퇴진 후의 대안은 지금 딱히 없지만 방법이야 또 생기지 않겠습니까.”(공인중개사 우씨)
“한 달 동안 정부가 보여준 걸로 보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정부가 국민 목소리를 이렇게 계속 무시한다면 퇴진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선경숙씨)
“정부는 완벽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 못해요. 미국 백악관 앞에서도 시위를 하는데 왜 청와대 앞이라고 못 합니까.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데 (대통령이) 하는 변명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됩니까. 이 대통령의 대안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이 대통령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란 걸 깨닫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면, 퇴진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신분 노출을 거부한 20대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