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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가요 / K Pop

유재하, 한국음악의 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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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계의 모차르트 - 클래식을 대중음악에 접목

-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17년 전인 1987년 11월 1일.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젊은 신인 뮤지션이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가요계의 모차르트’ 로 불리는 요절 가수 유재하다. 사실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의 순수 음악도가 대중 가수로 변신한 것도 특별했다. 그는 사망 3개월 전에 데뷔 음반 ‘ 사랑하기 때문에’ 한 장을 세상에 남겼다. 그는 단 한 장의 음반만으로 “ 대중 음악의 수준을 몇 단계 높였다”는 사후 평가를 이끌어 낸 가수다. 세월이 흐를수록 생존의 아쉬움이 더해가는 싱어 송 라이터 유재하. 그래서 그를 기리는 가요제를 통해 수많은 재능 있는 후배 가수들이 15년이 넘도록 배출되고 있다.


그는 사업가였던 부친 류일청씨와 모친 황영씨 사이에서 3남 3녀중 다섯째로 1962년 6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정 많고 유순한 성품이었던 그는 효자로 알려져 있다. 69년 서울 은석 국민학교를 입학해 75년 삼선중, 78년 대일고를 졸업하고 81년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하는 순탄한 성장기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재능이 탁월했던 그는 순수 음악을 전공했지만 대중 음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작곡 뿐 아니라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연주가였을 만큼 다재 다능한 만능 뮤지션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84년, 그는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조용필은 그의 대표 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먼저 취입했다. 86년에는 김현식이 주도한 록 그룹 ‘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창립에 참여해 잠시 활동을 했다. 대단한 술꾼이었던 그는 김현식과 술 친구로 지내며 음악적 교감을 나누었다. 김현식에게는 ‘ 가리워진 길’, ‘그대 내 품에’ 등 2곡을 주었다. 하지만 조용필, 김현식 모두와는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기에 탈퇴를 했다.

그는 클래식 같은 고급스럽고 편안한 대중 음악을 꿈꿨다. 인기보다는 뜨거운 음악 열정으로 자유롭고 새로운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한 그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갔다. 이 때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데이프를 제출했다.

같은 시기에 대중 가수로 출발하려는 음대 출신의 유재하, 이원재의 음악을 놓고 김영 사장은 고민했다. 그러나 독특했지만 상업적 성공이 불안했던 유재하의 음악은 탈락을 했다. 좌절을 겪은 유재하는 87년 8월 창작 곡 9곡을 수록한 데뷔 음반이자 유작앨범이 된 ‘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하는 아픔을 겪었다. 음반 발표 후 가식 없는 담백한 목소리로 노래한 타이틀 곡과 ‘ 우울한 편지’, ‘ 지난 날’등이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11월 1일 그는 느닷없이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노래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요절 소식은 관심을 모았다. 그래서 그는 사후에 더욱 알려진 가수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근 570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화제가 되었던 영화 ‘살인의 추억’에 그의 노래 ‘ 우울한 편지’가 주제가로 부활되었다. 비오는 날 살인이 벌어지기 전 살인자의 라디오 신청 곡으로 흘러 나온 그 재즈 풍의 우울한 노래는 새삼 화제가 되었다. 사랑의 연가가 살인자의 노래로 둔갑 됐던 것. 사실 그의 대부분 음악은 자신의 사랑 이야기다.

‘ 우울한 편지’는 대학 1학년 때 만나 첫 눈에 반했던 여인이 보낸 편지의 답장 같은 노래. 첫 만남 후 사랑 고백을 했지만 퇴짜를 맞은 유재하는 2년간 구애를 펼쳤다. 결국 열정과 순수로 가득찬 그를 받아들인 여인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미 비극적인 사랑의 끝을 예감했던 것일까. 편지에는 유재하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그녀의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그의 노래들은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몇 번의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의 연애일기에 다름 아니다. ‘ 그대 내 품에’는 사랑을 구애하던 시절의 애타는 마음을, ‘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이 받아들여진 가슴 벅찬 기쁨을, ‘ 지난날’은 짧은 이별의 서글픔을, 대표 곡인 ‘ 사랑하기 때문에’는 다시 돌아 온 그녀를 위한 곡이었다.

80년대 말, 독특한 코드 진행으로 가요의 수준을 외국 팝 뮤직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유재하. ‘ 우울한 편지’에서 선보였던, 메이저와 마이너코드가 섞인 변형적인 코드 진행은 불협화음보다는 놀랍게도 편안함을 안겨 준다. 그의 곡이 고급스럽게 들리는 것은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등 기존의 세션 포맷에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오보에, 클라리넷 등 클래식 악기들을 동원했기 때문. 또한 프로 세션맨으로 활동했을 만큼 탁월했던 연주능력은 밑거름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저버린 그의 음악성을 기리기 위해 뜻 있는 음악인들이 ‘ 유재하 가요제’를 창설했다. 조규찬, 정혜선, 고찬용, 박인영 등이 이 가요제를 통해 배출된 대학생 싱어 송라이터들. 85년 조용필을 필두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룰라, 정수라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금년 7월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 영화제작사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연예인’이라는 설문 조사를 벌였다. 유재하는 당당히 5위에 랭크되었다. 최근엔 한 영화가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며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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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의 자취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1987년 여름, 이 앨범이 나왔을 때 “가수가 너무 노래를 못 한다”고 비아냥댄 가요관계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반응은 생경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 “한국의 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고 말했을 만큼 평가의 그래프가 정반대 쪽으로 향해 있다.

그해 11월1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바로 그날에 벌써 그는 대중음악의 전설로 비상했다. 신승훈은 “그의 유작 앨범에 작사 작곡 편곡자가 쭉 유재하로 써있는 것을 보고 일대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공교롭게도 유재하가 사망한 날과 자신이 데뷔한 날이 같다며 그것을 숙명처럼 알아왔다는 것이다.

유재하가 음악계에 얼마나 큰 자취를 남겼는가는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려 유희열, 조규찬, 심현보 등 영향을 받은 음악인재들이 속출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럽게 '유재하사단'이라는 수식도 등장했다. 상기한 인물들은 물론, 유영석 한동준 김광진 김동율 무수한 음악가들이 거기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는 유재하에게 바치는 곡을 발표한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우리 음악가의 이름 뒤에 사단이란 거창한 말이 붙은 사람은 신중현과 유재하밖에 없을 것이다.

생전에 유재하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작사 작곡 솜씨도 뛰어났다. 악기에 능통한 덕분이었지만 편곡까지 도맡았다는 점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신승훈에게 놀라움을 주었듯 아마도 우리 음반역사상 작사 작곡 편곡을 혼자서 해낸 작품은 이 앨범이 처음일 것이다.

이후 많은 뮤지션들은 가사와 멜로디를 쓰는 것 외에 그 평면적인 악보를 자기 스스로 곡으로 옮기는 작업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편곡을 스스로 한다는 것은 앨범을 완전한 자기 작품으로 빚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음악적 자주(自主)의 완전 실현이다. 자신의 독자적 상상력을 앨범이라는 실체로 꾸려내는 음악가에게는 꿈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전공, 클래식의 화성학을 터득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앨범 중간에 연주곡으로 수록한 'Minuet'은 확연히 그의 음악적 영토를 일러준다. 게다가 흔히 클래식 음악의 세례를 받은 뮤지션들이 약한 대목인 가사 쓰기에도 능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는 1985년 졸업하기 이전인 대학 재학 시절에 이미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만이 속하는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활약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뛰어난 재기를 발했다.

그만큼 이 앨범은 도식적인 멜로디의 재래식 방식이 아닌, 탄탄한 음악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MBC 라디오 조정선 부장은 “이 앨범은 다양하고 어려운 화성을 대중음악에 소화해낸 최초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화성적 접근 외에 도처에 지금 들어도 깜짝 놀라게 할 음악적 장치들이 숨어 있다. 어떤 작곡가는 심지어 '보물찾기'의 충동을 자극하는 작품이라고도 규정한다.

유재하의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모를 슬픔이 배어있다. 수작으로 평가받는 '가리워진 길'을 비롯해 '텅 빈 오늘밤' '지난 날' 등 모든 곡이 처연함의 극치를 보인다. 그리하여 '천재'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멜로디만을 따르는 일반 음악소비자들에게는 생경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여러 번 듣는 인내의 자세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유재하의 음악은 적어도 뮤지션들에게는 당대에 벌써 높이 평가받아 이 앨범의 곡 '가리워진 길'은 김현식이 먼저 노래했다. 하지만 김종진 전태관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은 “1986년 (김)현식형이 3집 녹음을 했을 때 유재하가 비장의 곡 다섯을 써냈으나 그중 하나인 '가리워진 길'만이 채택되자 상처를 받은 나머지,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향해 팀을 나가고 말았다.”고 증언한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상기했듯 유재하가 조용필 밴드에서 연주했던 인연으로 당대 최고가수 조용필이 부르기도 했다. 아마도 종래의 가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코드워크와 멜로디에 끌려서 불렀을 것이다. 이 음반은 2001년 한 라디오프로가 실시한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당당 '우리 시대의 명반 1위'로 선정됐다.

또한 2003년에는 '우울한 편지'가 그해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 극중 라디오에 흐르는 곡으로 삽입되어 다시금 유재하에 대한 추억을 환기시켰다. 우리 가요계의 흐름을 바꾼, 이를테면 뮤지션의 편곡에 대한 개념이 음반제작에 확립되는 계기를 마련한 위대한 앨범이다. 우리 대중음악이 유재하 전과 유재하 후로 나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일 수 없다.

유재하의 삶

- 지운 (음악웹진 이즘 필자)

1987년 11월 1일 새벽 강변도로를 달리던 차가 택시와 충돌했다. 거기에 타고 있던 25살의 꿈 많던 미완의 음악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즉사했다. 그렇게 유재하라는 천재의 전설은 시작된다(유독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변을 당했으며 그 사고로 그 친구의 부모는 4천4백60만원이라는 배상 판결을 받게 된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유일청 - 1989년 작고)와 어머니 황영씨 사이의 3남 3녀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그는 소위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전기 기타로 자신의 싹트는 창작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삼선중학교시절, 그는 브레드(Bread), 퀸(Queen), 비틀스(Beatles), 피터 프램프톤(Peter Frampton)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했다) 클래식으로 진로를 잡게 된다.

대중 음악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 이였기에 음악을 위한 선택은 사실상 그것이 전부였다. 한양대 음대 작곡가를 지망(이 당시의 동창으로 그와 알고 지내던 이는 작곡가 김형석과 수요 예술 무대라는 인기 장수 라이브 프로그램의 PD인 한봉근이 있다)한 그는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 그룹에 몸을 담게 된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의 방해로 중단되었지만 후에 그의 목소리로 전국을 강타하게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의 7집에 수록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 들어가게 된다. 이 그룹에서 그는 6개월간 활동하면서 김현식에게 역시 그의 유작 앨범에 있는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취입하게 한다.

그룹을 나온 후 솔로 앨범을 위한 작업에 대한 구상을 마친 그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이자 후에 매니지먼트를 맞게되는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에 대한 완벽한 밑그림을 이미 제시해 놓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은 드디어 1987년 3월 봄의 새싹들과 함께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그는 방송사의 오디션(일종의 가수에 대한 심의 같은 것이다)에서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되고 앨범에 대한 늦은 반응으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된다. 거기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은 예선탈락의 비운을 맛보고 만다.

길게만 느껴지던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팬들의 사랑을 느낄 즈음 그의 삶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지되었다. 그가 앞으로 발표할 수많은 걸작들을 음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그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나갔다.

1년 후의 추모공연은 조동진, 이광조, 김수철과 같은 당대의 음악인들이 함께 했으며 그 수익금과 더불어 발족된 유재하 음악 장학회는 조규찬, 유희열, 이규호, 박인영 등의 기라성 같은 신예들을 배출했다. 그의 사후 10주년에는 김현철이 주축이 되어 신해철, 이적, 이소라 등 100여 명의 음악인들이 모여 추모앨범을 만들었으며 기념비를 만들려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의 행렬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가 남긴 발라드의 문법은 이후 이문세를 비롯한 변진섭 등 1990년 댄스 음악의 출현이 있기 전까지 우리 음악계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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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음반이 곧 유작앨범이 된 비운의 가수 유재하.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요절도 애통했지만 음반 속에 수록된 모든 곡을 직접 작사, 작곡, 연주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재능에 편곡까지 가능했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은 대중음악계의 큰 손실이었다. 단 한 장의 음반을 통해 “생소한 변조와 독특한 코드 진행으로 대중음악의 수준을 외국의 팝 이상으로 몇 단계 끌어 올렸다.”는 극찬을 이끌어낸 뮤지션은 전례가 없었다.

유재하의 1집은 향후 대중음악이 나가야할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앨범이었다.
범상치 않은 그의 독집은 타고난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에다 한양음대 작곡과에서 화성학을 깨우친 음악적 뿌리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순수음악을 전공했지만 대중음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그는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기타, 키보드 등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각 종 악기를 마음대로 주물렀던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만능 뮤지션이었다.

대학졸업을 앞둔 1984년, 당대 최고의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거쳐 김현식이 리드한 록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키보드 주자로 참여하며 공식 데뷔를 준비했다.
이때 조용필은 그가 쓴 ‘사랑하기 때문에’를 먼저 취입했다. 2달여의 녹음 끝에 창작곡 9곡을 수록한 1집은 이원재의 데뷔음반과 경합하는 산고 끝에 탄생했다.

그의 1집은 3가지 종류의 재킷이 존재한다. 1987년 4월에 발매된 초반은
대표곡 ‘사랑하기 때문에’가 담배연기로 디자인된 독특한 이미지의 재킷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4개월 후 유재하의 사진으로 평범하게 디자인된 LP와 CD가 동시에 재 발매되었던 것. 수록곡 대부분은 독특한 변조의 코드진행 때문에 처음엔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음악관계자들은 이전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음악이 등장했음을 직감했다. 그의 곡이 고급스럽게 들리는 것은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등 기존의 세션포맷에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플롯, 오보에 같은 ‘클래식 악기’까지 연주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연주곡 ‘미뉴에트’는 그의 천재성을 확인시키는 근사한 곡이다.

2003년 봉준호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사후 16년 만에 그를 부활시켰다. 부녀자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가 비가 오는 날이면 라디오에 신청한 묘한 분위기의 ‘우울한 편지’가 젊은 층의 호기심을 유발시켰던 것.
사실 이 곡은 그가 대학 1학년 때 만나 첫 눈에 반했던
한 여자친구의 편지가 모티브가 되었다. 첫 만남 이후 2년 간 퇴짜를 맞으며 구애를 펼친 그가 처음으로 받았던 편지였다. 유재하에 대한 연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담긴 그녀의 편지는 이미 비극적 사랑을 예감했다.

‘그대 내 품에’는 사랑을 구애하는 애타는 마음을,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이 받아들여진 가슴 벅찬 기쁨을, ‘지난날 ’은 짧은 이별의 서글픔을, 대표 곡 ‘사랑하기 때문에’는 다시 돌아온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이처럼 그의 노래들은 여자 친구와의 첫 만남부터 몇 번의 헤어짐과 재회를 거치는 상황을 담은 솔직한 연애일기였다.

그의 요절은 소위 연예계의 ‘11월 괴담설’ 진원지가 되었다. 1987년 11월1일 그가 사망한지 딱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뒤를 이었기 때문.
당시 유재하와 김현식은 음악선후배를 넘어 절친한 술친구로 밤을 세워가며 음악적 교감을 나눴던 사이다. 그래서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소름 돋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또한 유독 11월에 줄을 이은 연예계의 사건사고로 인해 ‘11월 괴담’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유재하는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선보인 뮤지션이다.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1집은 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풍성하게 살찌우게 한 기름진 자양분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생존에 대한 아쉬움이 더해가는 고 유재하가 한국대중음악계의 빛나는 전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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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