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가수라기보다는 한국적인 뮤지컬의 창시자, 혹은 연극 연출가, 기획가로 더 익숙해진 김민기. 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아직 동아리란 말보다는 서클이란 말이 더 익숙했던 그 시절에 나는 가톨릭학생회란 서클에 가입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가본 MT에서 우리는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선생님과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노래들을 배웠다. 그때 배운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였다. 선생님이 한 잔씩 나눠주던 맥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우리들은 처음 들어보고 배워보는 그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에 젖어 밤하늘의 별들이 빗방울에 젖어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 계곡에서의 MT. 나는 지금도 그날 밤의 별과 모닥불, 그리고 저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그날밤 세상에 조금도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만이 김광규 시인의 싯구처럼 그 해 세밑을 달궜다. 그리고 이듬해 87년 우리들 중 많은 친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 학생, 청년들 중 하나가 되었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들은 더 이상 불리워지지 않았다. 우리들의 노래는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에서 <농민가>, <타는 목마름으로>으로 그리고 다시 좀더 격렬한 운동가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당시 사회과학 서적의 커리큘럼이 백산서당의 책으로 시작해서 몰래 구해 읽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이어지듯 우리들은 김민기의 노래로 시작해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솔직히 나보다 조금 윗 세대의 사람들에게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김민기의 노래는 온전히 김민기의 것이거나 아니면 이제 막 목울대가 굵어가던 청소년기의 우리들의 노래로 기억된다. 솔직히 그 점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순수의 시대에서 안정의 시대로
1968년. 전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청년 문화는 1970년에 접어들면서 차갑게 식어 버렸다. 60년대를 정의했던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밥 딜런은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나왔고, 존 바에즈만이 고독하게 자리를 지켰고, 청춘의 광폭한 질주를 노래했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드스탁은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히피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에 대한 낭만적 열정은 시들어 버렸고, 버려진 청년 혁명가들은 산 속으로, 혹은 도시의 곳곳에서 고립된 채 폐기되고 있었다. 1960년대가 '순수의 시대'이자 '광기의 시대', '혁명의 시대'였다면 1970년은 그 벽두부터 그런 혁명과 순수, 광기의 불꽃이 한 줄기 비에 사그라들 듯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영향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새마을 운동의 근면, 협동, 자조의 깃발 아래 대중문화는 그야말로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시들어 사라질 지경이었다.
싸르트르가 죽었을 때 누군가 그랬단다. "이제 프랑스도 조금 외롭겠다고"고. 우리에게 1970년대의 김민기가 없었다면, 그 시기의 대중문화는 우리 문화사에서 단 한 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라고. 솔직히 나의 세대가 김민기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세대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침이슬>에서 시작되어 다른 노래들로 건너갔듯이 한동안 그의 모호한 태도(이 말은 순전히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다. 김민기 자신이 특별히 어떤 입장을 밝힌 적은 없기 때문에.)로 인해 그를 용도 폐기하는 분위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김민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광석도, 안치환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꽃다지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를 잘 알 수 없는 세대라는 편리한 이유로 이 글들은 인터 넷사이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 와 김창남 교수의 책의 많은 도움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김민기 - 곡절 많은 역사의 유복자
김민기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직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고, 김민기는 유복자로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을 다녔고,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 내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동하다 제적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증을 땄다. 귀국 후 남부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이리의 병원에서 김민기의 부친과 만나 결혼하여, 10남매를 낳았다. 김민기는 그중 막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김민기에게 활동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한다.
그는 서너살 때부터 어머니와 형, 누나들이 각기 직장과 학교로 나간 후, 늘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텅빈 집에서 하루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글자를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체험은 다분히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을 동반한 채 아직도 그의 뇌리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혼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다가 듣게 되던 방공훈련의 사이렌 소리, 거의 매일 밤 되풀이되던 등화관제의 칠흑같은 어둠, 그 어둠속에서 간간히 들리던 개 짖는 소리, 검은 깃을 씌운 전등 아래서 듣던 괘종 시계 소리, 지붕 밑 홈통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 그의 감수성 속에 최초로 자리잡은 음악은 바로 그런 소리들이었다.
1963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의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웃 활동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물론 공부는 뒷전이었다. 당시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가 그를 음악의 세계로 이끈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는 피아노 밑에서 누나의 연주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음악적 감각은 거기서 크게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누나의 연주에서 틀린 대목을 정확히 꼬집어 내는 '훌륭한 귀'를 가지게 된다. 그 당시 그가 다룰수 있었던 유일한 악기는 소년단실에 있는 우크렐레였다. 캠핑 때마다 우크렐레로 노래를 반주하는 일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1966년, 경기고등학교 입학하여서의 생활도 중학교때와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에게 그 자신의 악기가 생긴 것이다. 셋째 누나가 입학을 기념하여 선물한 클래식 기타는 그가 최초로 소유한 악기였다. 그는 혼자서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이용해 기타를 익혀나갔고, 얼마 안가 학교 내의 소문난 기타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누나가 선물한 기타는 그후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셈이었다.
미술에서 음악으로 -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한 그는 더욱 그림에 몰두했고, 1학년때 이미 개인전을 열 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대학교과과정의 미술수업은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았다. 따라서 학교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되었고, 결국 그는 1년 낙제를 하게 된다. 그가 학교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에 몰두하고 있을 때 고교시절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던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자기와 함께 듀엣을 만들어 노래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그림 그릴 물감값이 아쉬어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1만원 가량의 빚까지 지고 있었던 김민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둘은 함께 기타를 치며 다방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라는 의미)'였다. 그가 낙제를 하고 두번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동창이던 임문일(그는 70년대초 한때 DJ로 인기를 누렸었다.)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나게 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그에게 노래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을 비롯,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YWCA에 이른바 통기타 붐의 시발점이 되었던 '청개구리홀'이라는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이곳에서 자유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어울리곤 했다. 김민기도 자주 이곳에 들러 노래를 부르곤 했는 데, 이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였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이 그의 재질을 높이 사 레코드 출반을 주선해 주었다.
1971년 그는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이 되다시피한 자신의 레코드(LP)를 취입하게 된다(이 LP는 계속 판매금지에 묶여 있다가 1987에 가서야 재발매가 되었지만, 아직 CD 버전은 발매된 적이 없다). 이 레코드는 발매된 지 얼마안가 압수조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1972년 봄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부르기를 지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불러준 노래는 '우리 승리하리라(Pete Seeger의 We shall overcome의 번안곡)',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등 세 곡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있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피우는 아이'가 그의 노래중 처음으로 방송금지되었다. 이것이 그가 그후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행로의 시작이었다.
김민기와 김지하의 만남 그리고 노동자
그가 가수 및 작곡가로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1971년 무렵, 시인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던 한 시인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대단히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당시 김지하 등을 중심으로 유수한 시인, 학자, 화가, 음악인, 영화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문화의 방향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임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폰트라(PONTRA : Poem ON TRAsh, 즉 "잿더미위에 시를"이란 뜻)였는 데, 김민기도 이 모임에 참가하여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김민기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술반 동기이며 함께 서울대학에 다니고 있던 친구 이도성 등과 함께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노동자와의 야유회에서 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가지 체험을 이때 하게 된다. 마산 수출공단의 노동자들과 해변으로 야유회를 갔을 때였다. 막 석양이 지는 바닷가로 하나씩 둘씩 돌아오는 고깃배들을 바라보다 그가 무심코 "야, 참 멋있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 옆에 같이 있던 여공 한 사람이 쏘아 붙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예요. 뭐가 멋있다는 거지요?" 그 때 그는 뒷통수를 철퇴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난 아직 멀었구나'싶었다. 이 조그만 체험이 그 자신의 감성적 기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겪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가져온 소위 '지식인적'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대해 뼈저린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그의 삶의 커다란 지주의 하나였던 그림에도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화면을 수정하기 위해 칼로 긁어 내다가 캔버스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뚫린 구멍 사이로 방금 그가 그리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도데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의 방식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해 겨울 무렵을 기해 그는 완전히 서양화 붓을 놓아 버렸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아끼던 기타는 후배 누군가에게 주어 버렸다.
'금관의 예수' 공연과 김민기
1973년 무렵,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카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이 공연에는 김민기 외에 많은 연극패 탈패들이 참가했던 바, 이를 계기로 김민기는 연극패, 탈패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노래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이곳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첫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에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이 달려있었다)'는 첫 공연지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작곡되었다.
김민기가 국악에 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당시 미대에 함께 다니던 김구한을 통해서였다. 김구한은 1966년에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하였으나 형편상 입학을 포기했다가, 1969년에 미대에 입학, 조소과에 다니고 있었다. 김구한에게서 단소를 배우면서 전통음악에 접하기 시작한 김민기가 보다 본격적으로 국악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작곡과 출신의 이종구와 김영동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첫 작업은 음대의 동아리인 '20세기 음악연구회'의 발표회 무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경림의 시에 이종구가 곡을 붙인 작품이 국악과 기타반주로 무대에 올려졌다. 기타부분의 편곡과 연주는 물론 김민기가 맡았다. 1973년 말, 김민기는 경음악 평론가 최동욱의 주선으로 지구레코드사와 미국으 RCA와 함께 라이센스 음반을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때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준비한 것이 1974년 4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이종구 작곡발표 무대였다.
이 작곡발표회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 데, 제 1부에서는 이종구가 작곡한 작품들을 김민기가 노래불렀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빈 산', '서울길'을 비롯, '백제관음', '하나이었다더라'등 여러 노래들이 국악반주로 발표되었다. 제 2부에서는 한·일관계의 문제를 특히 기생관광에 초점을 맞추어 풍자한 소리굿 '아구'가 공연되었다. 소리굿 '아구'의 대본은 남사당 덧뵈기중의 먹중과장의 기본골격을 원용하여 김민기가 정리한 것이었고, 이종구가 작곡을 맡았으며,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이애주 등이 참여했다. 이 국립극장 공연은 TV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녹화도중 중단되었고, 레코드 출반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그 노래들이 공연 윤리위원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연자체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어 입장료가 200원인 데 암표가 무려 3000원씩에 거래될 정도였다. 전통 탈춤양식이 오늘의 문제를 담는데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를 보여준 이 소리굿 '아구'는 이후 1970년대 전반을 통해 크게 일어나 마당극 운동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어준 것이었다.
1974년 10월, 군에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카츄사 중의 카츄사로 불리는 AFKN 방송국이었다. 그가 비교적 편한 군대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은 소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꿇고 있었다. 카톨릭권을 중심으로 국민투표 보이코트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고, 투표당일에 명동성당에서 하루종일 투표를 반대하는 집회와 공연을 벌이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 모임의 계획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다. 소위 '운동권 가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지만 이 일로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소환되었고, 곧 이어 최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전방으로 배치되어 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2월 혹한 속의 차디찬 사단 영창이었다. 내복도 못입은 채 15일간의 독방 영창생활을 마친 후 그 곳에서 그는 나머지 군생활을 보냈다.
군에서 재대했을 때,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는 자신이 입대하기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는 '위험인물'로 단단히 낙인찍혀 있었고,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여전히 그의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었지만, 그를 인기가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가에서 불리우는 노래 가운데에는 그의 노래외에 작자미상의 구전가요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도 김민기의 노래일 것이라고 지레 단정짓곤 했다. 그는 본의아니게 대단한 투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제대하고 얼마후, 그는 가까스로 부평근처의 어느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생산직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의식화 교육'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밤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학이 아닌 조학인 셈이었다. 이 때, 그와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그는 '상록수'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기도 했다. 그의 현장생활에 관해서는 소설가 조세희가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이라는 작품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그는 당시 서울미대 학장의 배려로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중등교사 자격증도 함께였다. 대학에 입학한 지 9년만의 졸업이었다. 더 이상의 공장근무가 곤란해지자 그는 퇴사했다. 그후 한동안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숙하며 노무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로서는 몹시도 춥고 외로운 시기였다.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과 노래굿 '공장의 불빛'
양희은이 노래한 이 디스크는 그가 군대시절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 그리고 제대후에 만든 '밤배놀이', '상록수(앨범에서는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 제목이다)'등, 그의 작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어느 한곡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다(앨범의 작사작곡자는 김아영으로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래가 문제가 아니라 작곡자의 이름이 문제였으니 심의 기준치고는 기가 막힌 심의기준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이름을 빌어 낸 이 앨범은 그나마도 얼마안가 일부가 삭제되었고, 곧 다시 판금되어야 했다. 말썽이 된 것은 '늙은 군인의 노래' 때문이었다(이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이 노래는 약간의 가사를 바꾸어 나중에 군대에서도 부르게 되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공장의 불빛>은 1970년대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굿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낸 것이었다.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테이프에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비로소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공장의 불빛'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그는 당연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백원담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이 때 김민기는 아현동의 어느 무용교습실을 빌려 한국의 마당굿을 토대로 하여 공장의 노동작업을 형상화한 기계춤을 그가 직접 지도하며 공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1979년의 초봄 무렵 김민기는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공연장에서 <공장의 불빛>을 공연했다. <공장의 불빛>은 그가 시쳇말로 '빵에 갈 각오'를 하고 만든 것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구속되지 않고 곧 풀려나왔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이제 더욱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아무데도 갈곳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부친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익산의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머슴살이 조차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주인집은 정기적으로 그에 관해 경찰에 보고를 해야 했다. 10·26이 터진 후 그는 김제로 옮겨 소작농사를 시작한다.
80년 광주와 농사꾼으로 변모한 김민기
10.26직후, 한국사회는 새로 맞을 봄의 기대로 잔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민기가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야학의 후배 강학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여성 해고 노동자들에게 보모교육을 시켜 유아원을 설립하고자 한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10.26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유아원 기금마련 자선공연이 김민기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은 한줄도 비치지 않았지만 소문을 듣고 문화체육관에 몰려든 젊은이들이 김민기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쏟았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계속되는 앵콜 요청으로 다섯곡이나 더 불러야 했다. 이 공연에서 마련된 자금으로 '해송 아기둥지'라는 이름의 유아원이 설립되었다.
1980년 봄, 광주지역 대학출신의 문화패들이 극단 '광대'를 조직, 창립공연으로 마당극 '돼지풀이'를 공연했다. 이 창립무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축사를 했고, 김민기가 기획, 양희은 등이 찬조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김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라도 지역의 문화패를 비롯,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모내기철이나 추수때면 각지의 친구, 후배들이 모여들어 일을 도와 주었고 그의 집은 마치 장터처럼 떠들썩하기 마련이었다. 이 때 김제·전주지방의 젊은 연극패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었는 데, 그는 이들을 규합,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창작했고, 1981년, 전주에서 소규모 위크샾 형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1년, 김민기는 전곡으로 옮겨 작은 아버지와 함께 소작을 시작했다. 그 때 그는 영농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내내 해태 양식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전곡에서 농사를 짓던중 그는 농민의 현실을 더욱 깊이 절감하는 계기가 된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해 그는 약 5000평 규모의 참깨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회사에서 그 일대를 맡아 액체비료를 살포했는 데, 나중에 보니 싹이 몽땅 타 죽어 있었다. 김민기는 혼자서 원인조사에 나섰고 결국 비료회사에서 정량의 5배 이상이나 과다살포한 탓임을 밝혀낸다. 그때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각지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으나 도움받을 길이 없었고, 그는 혼자서 비료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 등에 관해 거의 완벽한 데이터를 작성해 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인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새마을 운동' 이후 마치 투기꾼처럼 변해 버린 농민의 모습과, 속으로 더욱 피폐해 질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1981년 겨울, 전곡의 민통선 북방지역에 5000평 규모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다. 단, 논옆에 있는 흉가 하나를 매입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겨울, 김민기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원을 벌었고, 그것으로 흉가를 매입, 그 곳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규합, 청년회를 조직했고, 그것을 통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 그곳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매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다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측과 소비자측에게 각기 250만원 정도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청년회는 이 이익금을 기금으로 쓸 수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마을 공동 목욕탕 건립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다. 이 일로 한때 엉뚱하게도 '쌀장수'로 소문이 났고, 시인 황명걸은 '쌀장수 김민기'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문예중앙, 1984 여름).
한국적 뮤지컬의 탄생, <지하철 1호선>
1983년, 극단 연우무대는 2년전 김민기가 전주에서 만들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의 대본을 손질하여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 본선에 올랐다. 이 연극은 김민기의 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는 데, 당시 제목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였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 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김민기의 명성에 힘입어 대학생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이래 최대의 관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가 전곡에서 농사꾼으로 일하고 있던 1983년 겨울, 그가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가지고 있던 책까지도 몽땅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만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새로 집을 지어줄테니 계속 머물러 달라고 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석만이 돌아왔다. 김민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김민기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마침내 김민기는 농촌생활을 일단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받아 시작한 이 기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창작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 내용상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작품임에도 그것이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윤심의를 위한 접수가 거부되어 심의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레코드사로부터 받아낸 계약금만 고스란히 빚으로 떠넘겨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낸다는 것은 그 내용을 불문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새로운 각오로 추진한 모처럼의 시도는 또 한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그 작업을 계기로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뮤지컬 출반계획을 추진하던 사무실에 상근하며 그의 작업을 도왔던 이미영이었다.
1985년 8월 31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른다섯의 노총각 김민기는 결혼식을 올렸다.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이 있던 서울미술관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그들은 불광동의 두칸짜리 전세방에서 새살림을 시작한다.
김민기 -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빚지고 있는 이름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원제는 Line 1-das Musical)는 김민기가 만든 <지하철 1호선>이 원작의 감동을 뛰어넘는 한국적 뮤지컬로 변모한 사실에 감탐하며 서울에서의 1,000회 공연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에서 직접 맥주 5통을 가지고 와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김민기는 지금도 일요일이면 집 앞의 작은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봄이 오면 땅을 갈고 돌을 고르고, 싹이 나면 솎아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저녁에는 그 밭에서 자란 푸성귀를 뜯어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먹는다고 한다.
얼마전 <지하철 1호선>은 중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중국 공연을 준비하느라 노심초사하는 김민기에게 백원담 교수는 "어떻게 되겠지요."라고 그를 위안하는 말을 생각없이 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민기는 몹시 화를 내며 "세상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제 청년 김민기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할 만한 기성 세대가 된 훌륭한 전범으로서의 김민기를 갖게 되었다. 김민기는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얼굴 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상품 교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해가는 작업을 <지하철 1호선>을 통해 해나가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사에서 김민기란 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몹시 쓸쓸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에도 김민기라는 한 개인에게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