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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가요 / K Pop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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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당시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암흑 그 자체였고 음악적인 분위기는 트롯이라는 장르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습니다. 미국의 60년대와 상황이 매우 흡사했으며, 이 상황에 Folk와 Rock의 유입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이때 Rock의 선구자라 할수있는 기타리스트 신중현이 나와 우리나라에 Rock의 싹을 키우기 시작했고 Rock매니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Rock이 뿌리를 내릴 토양이 마련되기 시작하여 이어서 대학 중심으로 그룹 결성 붐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서슬퍼런 유신의 시기에는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한 곡들이 아닌 진정한 Rock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한 노래들은 방송을 나가기도 힘들었으며 급기야 금지곡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금지곡이라는 것이 겨우 뿌리를 내리려던 Rock의 토양 자체를 없애 버리는 계기가 되어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Rock은 그 뿌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고만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5년 중반까지 신중현에 의해 뿌리내려지고 성장해온 한국 Rock의 명맥을 이은 Group이 바로 들국화입니다. 쇄퇴할뻔했던 한국 Rock이 들국화로 인해 다시한번 전성기의 시절이 맞이하게 되는데 들국화의 Live음반과 신중현의 Rock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이끄는 한국Heavy metal 공식 1호 Group인 시나위의 "크게라디오를 켜고"가 발표된 1986년을 시작으로 백두산, H2O등 여러 Underground Band들이 한국 Rock을 꽃피웠고 김현식, 유재하, 시인과 촌장, 신촌 블루스 등 언더 그라운드 뮤직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되면서 우리나라는 다시금 Rock의 토양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들국화의 영향
특히 들국화는 전인권이라는 걸출한 보컬리스트와 그를 주축으로 되어만든 Soft Rock을 표방한 그룹으로써 한국의 Beatles라고까지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또한 H2O, 시나위, 블랙신드롬, 백두산,부활이 이들과는 별도로 Hard Rock과 Metal의 계고를 이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들국화의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합니다.

그들은 지하에서부터 갑자기 나타나 처음부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창작력과 연주력을 보여주면서 직수입된 팝송이나 록 음악에 심취해서 "국산 가요" 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청소년들을 단번에 휘어잡아 들국화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컬트라고 하기엔 너무나 광범위하고, 폭발적인 현상이었죠.

들국화가 결성되기 l년 전인 1984년에 발매된 동아기획 옴니버스 음반 <우리 노래 전시회>는 최성원이 Produce 하고 전인권이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 렀으며 , 허성욱이 Piano 주자로 참여했습니다. Rock, Fork, Blues, Fussion 등 1970-80년대 Underground의 다양한 실험은 들국화 l집에 총집결되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감성 의 Rock 음악이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기교를 당시 우리 젊은이들과 청소년의 정서와 절묘하게 결합시켰고 이것을 '한국적인 록'의 등장이라고들 평가하였습니다. 들국화의 혁명적 돌파는 음악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소극장의 첫 공연을 시발로한 전국 순회 공연과 더블 라이브 앨범의 발매로 결실로 이들의 성공에 고무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소극장 공연의 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들국화의 쇠퇴
그러나 들국화의 찬연한 개화는 그다지 길지 않았습니다. l집 발표 직후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밴드를 탈퇴했고, l집에도 참여한 최구희를 멤버로 참여시켜 다소 급조해낸 기미가 보이는 2집을 발표하긴 했지만, 당시 밴드는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들국화 해산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밴드의 쌍두마차인 전인권과 최성원의 음악적 견해차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들의 전진을 가로막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상을 뛰어넘은 대중적 성공이 었습니다. 그들은 대중의 엄청난 반응에 대비할 준비를 미처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들국화가 사라진 1980년 말 H2O, 시나위, 블랙신드롬, 백두산,부활등 많은 그룹들도 하나 둘 기억속으로 사라지고 2인조 밴드였던 시인과 촌장 역시 함춘호가 빠지고 혼자 남은 하덕규도 가스펠 가수로 귀화하기에 이르렀으며 엄인호를 중심으로 한 신촌블루스도 매 앨범 고정 멤버를 갖지 못한 불안한 상태로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한국 Rock의 토양이 얼마나 허술한지 그리고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강산에, 김종서, 신해철, 시나위 등에 의해 Rock의 뿌리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전인권만의 Charismatic Music은 영원하리라 생각됩니다.

▶들국화의 재결성
지난 1983년 전인권·최성원·허성욱·주찬권씨로 결성된 들국화는 기타리스트 조덕환과 함께 1985년「행진」이 담긴 1집, 1986년「제발」이 담긴 2집을 잇따라 내며 언더그라운드 록밴드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으나 1989년 돌연 해체되었습니다.
해체 이후 전인권님은 솔로음반 2장과 라이브 앨범 등을 발표하였고 최성원님 역시「제주도의 푸른밤」이 들어 있는 1집과「어린왕자」의 2집을 발표, 주찬권님도 넉 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손진태님과 최구희님의 들국화 해산 이후 발표된 음반들도 역시 멋있고 좋았지만, 그건 단지「좋은 음악」뿐이었습니다.「그것만이 내 세상」의 절규도「세계로 가는 기차」의 흥겨움도 맛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움의 두께만큼 안타까움이 더해갔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3J(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의 죽음과 함께 미국의 히피 정신도 사이키델리 락도 하향곡선을 그렸습니다. 들국화의 해체 이후 90년대의 우리의 처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후로도 꽤 많은 락 그룹들이 부침을 거듭했지만, 아직까지 들국화가 이루어 놓은 높이와 깊이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중 들국화는 지난 1997년 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허성욱의 사망을 계기로 1998년 다시 모여 「안녕하세요, 들국화」란 공연을 가지며 들국화를 재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워낙 급하게 모인 터라 서로 음악적 입장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더구나 전인권님이 히로뽕 복용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최성원님, 주찬권님 등이 자주 면회를 오고 그의 석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서로간의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2000년 전인권님이 출소하자 그들은 다시 뭉쳤고 미사리의 <엉클톰>이란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호흡을 맞춘 끝에 지난 9월 2~3일 예술의 전당에서 재기 공연을 가졌습니다.

"나이가 들고 이젠 오래 음악을 했다는 생각도 드니까 책임감은 아니고 사명감 같은 게 생겨요. 후배들 보기도 미안하고. 해준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들은 이 땅에서 록음악이 아사 직전의 상태에 와 있는 것을 먼저 음악하는 사람들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최근 젊은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 가요사의 명반 가운데 압도적인 표차로「왕중왕」의 반열에 오른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80년대엔 희망을 말하고 싶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외롭잖아요. 그런 외로움을 잊도록, 우리를 속박하는 억압적 상황을 잠시나마 달래주는게 들국화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저항을 달랜다, 이런 느낌으로 노래했죠."
청중들은 들국화를「추억」하며 공연장으로 가겠지만, 들국화는 공연장에 모인 청중들에게「추억」이 아닌 새로운 「힘」과「정신」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들국화 1 집은 Lead Vocal/Acoustic Guitar 전인권, Bass 최성원, Guitar 조덕환, Piano/Synthesizers 허성욱... 4 인조로 시작하였으나 2 집을 작업하면서 Guitar 조덕환이 빠지고 Guitar 손진태 와 최구희, 그리고 1집에서도 제작에 참여했던 Drum 주찬권이 정식 Member로 완벽한 들국화의 형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들국화의 핵심은 전인권/최성원이라 할 수 있으나, 나머지 Member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들을 가지고 있는 당대 최고의 Sessionman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국화는 1983년 전인권(보컬, 기타), 최성원(기타, 베이스, 보컬)을 주축으로 결성되어 1985년 데뷔앨범을 발표하기 전까지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가진 장기공연으로 팬들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 이들의 데뷔 앨범 발표는 당시 침체기에 빠져 있던 록 그룹들의 활력을 되찾아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전인권의 카리스마적인 보컬과 최성원의 섬세한 음악, 허성욱의 영롱한 건반 연주와 주찬권의 정갈한 드럼 워크, 그리고 조덕환과 최구희의 절제된 기타연주가 조화를 이루며 록과 포크, 블루스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담고 있는 이 앨범은 수록곡인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사랑일 뿐이야', '매일 그대와' 등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이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1986년 조덕환이 탈퇴하고 손진태(기타)가 제작에 참여한 2집 앨범은 대부분 최성원의 곡들로 채워져 있어 데뷔 앨범에서의 폭발적인 모습보다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면이 많이 강조된 앨범이다. 특히 수록곡 중 '너랑나랑' 등이 라이브 레퍼토리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들국화 LIVE' 앨범을 발표하여 국내 라이브 음반 역사의 한 획을 긋기도 했다.

한편 2집 앨범을 발표한 후 멤버간의 음악적 견해차가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서 가요계에는 들국화 해체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1987년 미국 공연을 끝으로 멤버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최구희는 '괴짜들'을 재결성하여 앨범을 발표했고 주찬권은 '믿음 소망 사랑'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최성원과 손진태 역시 각각 솔로로 전향하였고 전인권과 허성욱은 함께 '사랑한 후에', '어떤 가을' 등이 수록된 '추억 들국화(1987)'를 발표하여 팬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해 대마초 파문으로 1987년 4월 들국화는 전격 해체를 선언하게 되었고, 1988년 허성욱이 '믿음 소망 사랑'에 합류함에 따라 홀로 활동하게 된 전인권은 '파랑새', '사랑하고 싶어', '돌고 돌고 돌고' 등이 수록된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해 4월에는 다시 한번 들국화 오리지널 멤버가 모여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들국화 재결합설이 항간에 떠돌게 되지만 1989년 '아듀 들국화 고별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각 멤버들은 자신들의 활동에만 전념하여 팬들의 기대는 차츰 시들해졌다.

1993년에 전인권은 동영욱(키보드), 이건태(드럼), 민재현(베이스)등의 진영으로 들국화를 재결성 하였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최성원도 전인권이 빠진 오리지널 멤버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치 핑크프로이드와 로저 워터스의 관계처럼 이들의 활동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1997년에 허성욱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을 계기로 들국화는 1998년 다시 한번 오리지널 멤버로 뭉치게 된다. 그리고 예전의 들국화의 음악들과 연직선상에 있는 '늦지않았습니다', '국화에 월백하고', '내일에서 온 신문', '15년 동안' 등의 신곡을 선보이며 다시 공연 활동을 재개하여 활동하고 있다.



추억의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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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Live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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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


CD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