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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Articles

달러를 삼키는 엔화, 미국을 공습하다

<미국 심장부에 ‘엔화 공습’ 시작>

기사입력 2008-10-20 14:33 | 최종수정2008-10-27 16:21 / Economist

#1. 2003년 3월 12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월스트리트가 일본 은행을 사들이고 있다’는 기사에서 “골드먼삭스가 13억 달러를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출자하고 메릴린치가 UFJ(현 미쓰비시UFJ)와 함께 자회사를 만드는 등 월가의 일본 공습이 거세졌다”며 “이를 바라보는 도쿄 은행원들은 잇단 외국 자본의 공격에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2. 2008년 10월 14일. 뉴욕타임스(NYT)는 ‘미쓰비시UFJ의 지분 인수 결정에 모건스탠리 주가 급등’이라는 기사에서 “미쓰비시가 90억 달러를 출자하면서 8달러42센트였던 모건스탠리 주가가 하루 만에 18달러10센트로 뛰었다”며 “일본 자본으로 모건스탠리가 기사회생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금융자본이 월가 투자은행들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올 1월. 자산이 1조 달러(은행 포함)가 넘는 미즈호코퍼레이션이 미 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현재는 뱅크오브아메리카에 합병)에 1억3000만 달러를 출자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홀딩스는 9월 22일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지역 부문을 2억2500만 달러에 인수하고 유럽·중동 부문은 직원 2500여 명의 고용승계를 조건으로 무상 인수키로 합의했다.

이어 일본 최대 은행이자 2004년 출범 당시 자산기준 세계 최대 은행이었던 미쓰비시UFJ는 모건스탠리와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10월 14일 우선주 60억 달러, 보통주 30억 달러 등 총 90억 달러를 출자키로 결정했다. 미쓰비시UFJ는 지분 21%를 확보하며 모건스탠리의 최대 주주가 됐다.

80년대 버블 때와 기초체력 달라

 
일본이 월가 진출을 우회 타진하던 1980년대는 버블의 한복판이었다. 수출대국이 된 일본으로 돈이 몰리자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면서 기존의 저금리 기조도 그대로 끌고 갔다. 하지만 무역불균형 해소를 외치는 미국의 요구로 뉴욕 맨해튼의 플라자호텔에서 엔화 가치를 높이는 데 합의하면서 버블 붕괴는 시작됐다.

1984년 1달러에 244엔이었던 것이 2년 만에 160엔이 된 것. 여기에 일본 정부는 기업과 개인들이 저금리로 대출을 받아 국내외 부동산을 사들이자 이를 우려해 금리를 높였고 부동산 담보대출을 시작으로 부도 도미노가 이어졌다. 당시 3만을 넘겼던 닛케이 지수는 그 후로 한 번도 3만 선을 넘기지 못하고 현재 8000대를 기록 중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금융의 월가 진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버블 당시와는 다른 점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투자처가 부동산이나 지방 상업은행이 아닌 투자은행이고 ▶지금 일본의 경기가 호황이 아니며 ▶버블경제 때 문제가 됐던 개인투자자들이 움직일 만한 자본력이 없다는 점을 차이점으로 지적한다.

문규학 소프트뱅크코리아 사장은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일본 은행들의 위기관리 능력이 굉장히 좋아졌다”며 “금융기관의 인수합병은 매출, 이익, 부채 등 철저하게 숫자를 바탕으로 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만큼 문화적 차이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금융위기는 지난 15년 동안 지나친 자산유동화와 레버리지(자기 자본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운용하는 것)를 키워 온 구미 은행 성장모형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 일본 금융계는 구조조정과 부실채권 정리, 레버리지 축소라는 키워드 아래 고통을 겪으며 내적으로 충실해졌다. 이 때문에 각종 파생상품에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됐다. 일본 금융기업들의 자본 충실도는 높아도 수익률은 낮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이번 금융위기의 파급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이득이 됐다.”

IMF의 이주경 이코노미스트는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일본 은행이 월가로 진출할 수 있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투자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 금융자본의 월가 진출은 장기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본 금융계가 3대 메가뱅크 체제를 갖춘 것은 2004년.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잃어버린 10년’ 막판인 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금융 빅뱅(정부 주도의 금융 대개혁)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사라진 대형 은행들만 수십여 곳이다. 이를 통해 인수합병 후에 찾아오는 혼란을 수습하는 데 이골이 났다는 설명도 탄력을 받는다. 포브스닷컴은 10월 13일 일본계 금융자본의 월가 유입을 “아시아에 10년 전 금융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서구 금융자본)을 아시아 자본이 돕고 있는 것은 금융계의 아이로니컬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소프트뱅크코리아 문규학 대표
“한국은 금융전문가 부족이 큰 약점”


소프트뱅크(대표 손정의)가 현재 투자한 회사는 미국,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850여 개에 달한다. 4000억 달러가 소요된 보다폰 인수를 포함해 액수로는 2조7000억 달러가량. 문규학 소프트뱅크코리아 대표는 일본을 대표하는 통신 및 투자기업인 소프트뱅크의 투자법칙을 ‘20-49-90’ 룰이라고 설명했다.

-소프트뱅크의 해외 투자전략은 무엇인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당 회사가 변화할 수 있는가를 먼저 본다. 인프라 기업은 지분 90% 이상, 플랫폼 제공 기업은 지분 49% 이상,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벤처기업은 지분 20% 이상을 투자한다는 ‘20-49-90’ 룰을 반드시 지킨다. 손정의 회장은 항상 ‘재능 있는 기업을 찾아내 우리의 인프라 위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소프트뱅크도 금융업에 관심이 많지 않았나.

“금융, IT 그리고 인터넷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제일은행 인수 당시 우리 지분도 있었다. 컨소시엄 지분의 20%를 갖고 있었는데 이미 처분했다. 증권회사도 e트레이딩을 하는 곳이었다. 다만 나스닥재팬의 경우에는 실패했다. 손 회장은 여전히 금융 시스템 구축에 관심이 크다.”

-일본 3대 메가뱅크와 최대 증권사 노무라가 미국 투자은행에 올 들어 대거 투자를 집행했거나 고려 중이다. 옳은 결정이었다고 보나.

“시점상으로는 맞다. 일본은 정보력을 바탕으로(투자은행 주가의) 최저점에 들어갔다. 더 이상 리스크 노출이 될 만한 게 없는 시기였다. 하지만 한국의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에 투자하려던 시점은 다르기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은 리스크가 많지 않았나.”

-지난해부터 일본 기업의 해외 M&A와 투자가 크게 늘었다.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을 보냈고 회복에만 5년이 걸렸다. 시점이 들어맞았다. 일본 금융계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겪어냈다. 수많은 은행이 인수합병되면서 3대 메가뱅크 체제로 변화됐다. 그러다 보니 합병 후 통합(PMI:Post Merger Integration)에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한마디로 자본력을 쌓아둔 상황에서 위기관리에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일본과 중국에는 큰 기회가 된다는 주장을 하는 외신도 많다. 인도의 자본력에 관한 말도 많은데 여기서 왜 한국은 빠져있다고 보나.

“금융도 실물경제가 뒷받침돼야 위력을 발휘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실물경제력에서 크게 앞선다. 무엇보다 아직 한국은 정부가 소유한 은행들이 남아있고 자본력도 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금융전문가들이 부족하다는 점은 큰 약점이다. 경험을 통한 사고의 차이란 것은 큰 딜을 한 번 해보면 당장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