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 … “은행 도산 더 이어질 것”>
기사입력 2008-09-22 04:32 최종수정2008-09-22 09:01 / 중앙일보 / 김선하 기자
“미국 자본주의가 결정적 전환점을 맞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넷판의 20일(현지시간) 기사 첫 문장이다. 미국 정부가 금융사의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7000억 달러(약 795조원)라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붓기로 하면서 20세기 이후 100년간 지켜온 '자유시장의 맹주'라는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공적 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이날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지방은행 아메리뱅크가 102년 만에 파산했다 . 미국 은행이 파산한 것은 올 들어 벌써 12번째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지난달 부실 은행의 수를 90곳에서 117곳으로 늘려 잡았다. 실라 베어 FDIC 총재는 “은행 도산이 앞으로 더 일어날 거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엉클 샘' 자본주의 흔들=대내외에서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동안 시장이 알아서 하게 두자던 미국·영국 정부가 이제 와서 '투명성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 경제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때부터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어 왔다.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것은 시장이고, 정부는 뒤에서 관리만 하면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믿었던 시장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 정부는 벌써 여러 개의 기존 방침을 뒤집었다. 올 3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예금자 보호를 받는 은행에만 돈을 꿔준다는 반세기 동안 이어진 전통을 깼다. 최근엔 예금자 보호 대상이 아닌 머니마켓펀드(MMF)의 원금까지 보장해 주겠다고 나섰다.
투자은행·파생상품모델 처참히 붕괴
증시, 하루 3%이상 폭락·폭등 반복
"각국 정부의 시장 개입 늘어날 듯"
1980년대 이후 수십년간 쌓여온 금융자본주의의 질서가 붕괴되는 순간은 단 1주일이었다.
지난 1주간, 세계 경제는 파괴와 혼돈의 상황이었다.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금융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그 발상지인 미국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금융 자본주의의 꽃이라던 투자은행(IB)과 파생상품 모델은 처참히 붕괴되고, 미국 3위와 4위의 투자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의 금융패권에는 제동이 걸렸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월스트리트를 '정부'와 '규제'가 다시 대체하고 있다.
◆악몽의 일주일
붕괴는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에서 시작됐다. 지난 14일(현지시각)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금융공황이 본격화 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 직격탄을 맞은 리먼브러더스는 산업은행과의 매각협상마저 무산되자 결국 파산신청의 길을 걸었다.
리먼의 파산 신청 후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아 제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500억달러라는 헐값으로 상업은행인 BOA(Bank of America)에 팔렸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충격적 뉴스가 또 나왔다.
어떤 금융회사가 더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미국 증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최대 폭락(-4.42%)을 기록했다. 미국 투자은행의 거대한 손실은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이라는 핏줄을 타고 전 세계 금융기관으로 퍼져 전 세계증시의 5~7%에 달하는 동반 폭락을 불렀다.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자 '더 이상의 구제금융은 없다'던 미국정부는 그 다음날 AIG에 850억 달러의 지원을 발표했지만 금융시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몇 차례 임시방편으로 사태를 막아보려던 미국 정부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월가의 금융부실을 도려내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증시는 지난 2004년부터 3년간 단 하루도 3% 이상 급등락한 날이 없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가 본격화된 2007년에도 3% 이상 폭락한 날이 단 하루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1주일간 미국 증시는 9월 16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3% 이상 폭등, 폭락했다.
◆규제의 시대로
미국이 잃은 것은 크다. 그동안 세계 경제를 주도해 오던 금융질서를 잃었다.
전문가들은 1주일간의 금융공황이 1980년대 미국 레이건 행정부 이후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실질적인 종언을 뜻한다고 평가한다. 투자은행(IB)들이 복잡한 구조의 파생상품을 이용, 최소한의 자금만 가지고 수십, 수백배나 되는 큰 돈을 거래하는데도, 이에 마땅한 규제가 없었다는 것이 금융공황을 불러일으켰다. 앞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금융시장을 규제하고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수석연구원은 "이번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이념 아래 투자은행의 경쟁력을 무기로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잡아왔던 미국 경제에 제동이 걸린 것"으로 평가했다.
설령 금융위기가 진정되더라도,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되면 재정적자가 커지고 달러화도 약해지면서 미국의 위상은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미국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아직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대국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新)자유주의 (neoliberalism)
작은 정부와 큰 시장, 세계화와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경제 이념.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중시하는 케인즈 이론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을 계기로 후퇴하면서 경제학의 신주류로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영국의 대처리즘, 금융 자유화, 변동 환율제, 자유무역의 확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위기 수습될까=미국 정부가 만들려는 부실자산 정리기구는 89년 세워진 정리신탁공사(RTC)와 비슷하다. 당시 이 공사를 통해 296개 부실 저축대부조합(S&L)의 자산 1250억 달러를 인수했다. 이후 6년간 3940억 달러를 들여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747개 금융사 자산을 더 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LA타임스는 “당시 사들인 자산은 부동산이 많았다”며 “지금 문제되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관련 자산은 가치 산정이 훨씬 어렵다”고 평가했다. 부실자산을 사준다고 문제가 다 풀리는 것도 아니다. LA타임스는 “아마도 금융사는 부실자산 값을 확 깎아서 팔아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비관론자들마저 이번 조치가 금융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정부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면 모기지 채무 부담이 줄어 가계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재정 견딜 수 있나=미국 재무부와 FRB가 올 들어 금융위기 해소에 쏟아 부은 돈은 드러난 것만 5500억 달러가 넘는다. 실제론 더 될 거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다 추가로 지난해 미국 국방예산(6000억 달러)보다 많은 7000억 달러를 쓰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재정 부담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무조건 FRB에 떠맡기기도 쉽지 않다. 중앙은행이 가용 재원을 다 써버리면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어서다. 따라서 상당액은 국채 발행이나 다른 수단으로 메워야 한다. 미국은 올 회계연도에만 4000억 달러 안팎의 재정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스 앤드 푸어스(S&P)의 존 체임버스 국가신용등급위원회 의장은 최근 “구제금융으로 미국 재정이 나빠져 최상급(AAA)인 국가 신용등급의 하향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국가부도의 위험이 없고, 신용등급도 최상급이라고 국제경제 교과서에 돼 있지만, 자칫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뒤 초저금리 정책 ‘재앙의 씨앗’
유동성 과잉으로 집값 거품·신용위기 불러
9·11테러가 7년 뒤 결국 미국의 심장부 월가까지 집어삼켰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이 나오면서, 7년 전 9·11테러가 월가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월가를 파산시킨 원인이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가 9·11 이후 경기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려 과잉유동성을 키운 것이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 위기의 뿌리인 서브프라임 사태는 9·11 테러의 충격으로부터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장기간의 저금리 정책이 낳은 결과이다.
2000년 하반기부터 미국은 정보통신(IT) 산업 부문의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급속한 경기 침체기로 빠져들었다.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BEA)의 자료를 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00년 3분기에 1%에도 못치는 성장률을 보인 뒤 2001년 들어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다. 이 와중에 터진 9·11 테러는 경기 하강국면에서 위축됐던 미국의 투자 및 소비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한 결정타였다.
위기를 타개할 구세주가 절실했다. 미 연준(FRB)의 앨런 그린스펀 당시 의장은 ‘초저금리 정책’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준은 2000년 5월 6.5%였던 연방 금리를 2003년 6월까지 13차례에 걸쳐 1%대까지 떨어뜨렸다. 특히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1월 이후 2% 이하의 저금리가 3년간이나 지속됐다. 이에 힘입어 2001년 4분기에는 국내총생산이 오히려 2.7% 성장세로 돌아섰다. 이듬해인 2002년 1분기에는 5.0% 성장을 기록했다.
넘쳐나는 유동성의 상당 부분이 주택 및 금융 파생상품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조지 소로스는 최근 저서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미국의 금융기관 등 대출업자들은 이자 수입을 늘리기 위해 주택을 실제보다 훨씬 매력 있는 자산으로 보이게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은 이미 5년 전인 2003년에 이같은 파생상품들을 ‘시한폭탄’ ‘금융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빗댔다. 그 시한폭탄들이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하면서 금융시장을 초토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 보코니대의 티토 보에리 교수는 지난해 ‘서브프라임 위기:그린스펀의 유산’이란 논문에서,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으로 △미국 가계들의 낮은 재무지식 △유동자산의 대규모 증권화를 가져온 금융제도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3년에 걸친 초저금리 정책을 꼽은 뒤, 이 중에서도 저금리정책이 절대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연준 이사진에선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에 방만한 금융대출 관행의 실태와 파장을 점검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린스펀은 묵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린스펀은 지난해 9월 <시비에스>(CBS)와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작동하길 원한다면, 얼어붙은 미국 은행시스템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 임무다. 이것은 금리를 서서히 내릴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저금리로 인한 유동성 과잉과 파생상품의 범람, 무책임한 서브프라임 대출이 불러온 위기에 대해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아주 최근까지 아무런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의 정치외교력을 손상시킨 9·11테러는, 미국 정부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과잉대응해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라는 참사의 밑바탕이 됐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패권에 타격을 주려는 9·11테러는 결국 그 목적을 일정 부분 달성한 셈이다.
<美경제 패러다임이 바뀐다… '신자유주의' 막내리고 관치경제시대로>
기사입력 2008-09-21 21:56 최종수정2008-09-22 10:19 / 세계일보 / 국기연 특파원
부시 행정부는 현재 미국과 세계의 금융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의 긴급성과 파급 영향 등을 고려할 때 경제 이념이나 정치 이념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12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의 자유 기업주의 시스템은 연방정부가 꼭 필요할 때 이외에는 시장에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서 “그러나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위험한 사태와 미국 국민의 일상 생활에 미칠 중대한 영향을 감안할 때 정부의 개입은 보장돼야 할 뿐 아니라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미국 금융시장의 대혼란을 방치했을 때 초래될 통제 불능 사태를 감안하면 정부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적극 개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미 정부 측 설명이다.
미 정계와 경제계는 부시 행정부의 이 같은 노선 전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최우선 가치로 상정해야 할 시점이라는 데 미국 사회에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다만 미국의 골수 보수파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큰 정부’라는 공화당 이념이 새로 탄생했다”며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개탄했다.
미 정부는 이제 경제의 감독 관청이 아니라 경제의 핵심 주체로 등장했다. 경제계에서는 ‘주식회사 미국’이라는 거대 공룡 기업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 정부는 초대형 모기지 업체인 패니매와 프레디맥을 사실상 국유화했다. 또 미국 최대 보험회사인 AIG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이 회사 지분의 80%를 인수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벌써 5000억달러 이상의 공적 자금을 쏟아부었다. 미 정부는 다시 7000억달러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 모기지 관련 부실 자산을 매입키로 했다. 미 정부가 이 같은 공적 자금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미 금융기관들의 생사가 엇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미국 금융기관들의 생사 여탈권을 쥔 ‘주식회사 미국’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상했다. 미국은 현재의 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민간이 아니라 정부가 이끌어가는 관 주도 경제 시대를 보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기사입력 2008-09-22 04:32 최종수정2008-09-22 09:01 / 중앙일보 / 김선하 기자
“미국 자본주의가 결정적 전환점을 맞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넷판의 20일(현지시간) 기사 첫 문장이다. 미국 정부가 금융사의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7000억 달러(약 795조원)라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붓기로 하면서 20세기 이후 100년간 지켜온 '자유시장의 맹주'라는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공적 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이날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지방은행 아메리뱅크가 102년 만에 파산했다 . 미국 은행이 파산한 것은 올 들어 벌써 12번째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지난달 부실 은행의 수를 90곳에서 117곳으로 늘려 잡았다. 실라 베어 FDIC 총재는 “은행 도산이 앞으로 더 일어날 거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엉클 샘' 자본주의 흔들=대내외에서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동안 시장이 알아서 하게 두자던 미국·영국 정부가 이제 와서 '투명성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 경제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때부터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어 왔다.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것은 시장이고, 정부는 뒤에서 관리만 하면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믿었던 시장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 정부는 벌써 여러 개의 기존 방침을 뒤집었다. 올 3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예금자 보호를 받는 은행에만 돈을 꿔준다는 반세기 동안 이어진 전통을 깼다. 최근엔 예금자 보호 대상이 아닌 머니마켓펀드(MMF)의 원금까지 보장해 주겠다고 나섰다.
<숨가빴던 지난 1주일 제동걸린 미(美)금융패권… '신(新)자유주의'도 막 내리나>
기사입력 2008-09-22 03:26 / 조선일보 / 최흡, 금원섭 기자투자은행·파생상품모델 처참히 붕괴
증시, 하루 3%이상 폭락·폭등 반복
"각국 정부의 시장 개입 늘어날 듯"
1980년대 이후 수십년간 쌓여온 금융자본주의의 질서가 붕괴되는 순간은 단 1주일이었다.
지난 1주간, 세계 경제는 파괴와 혼돈의 상황이었다.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금융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그 발상지인 미국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금융 자본주의의 꽃이라던 투자은행(IB)과 파생상품 모델은 처참히 붕괴되고, 미국 3위와 4위의 투자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의 금융패권에는 제동이 걸렸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월스트리트를 '정부'와 '규제'가 다시 대체하고 있다.
◆악몽의 일주일
붕괴는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에서 시작됐다. 지난 14일(현지시각)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금융공황이 본격화 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 직격탄을 맞은 리먼브러더스는 산업은행과의 매각협상마저 무산되자 결국 파산신청의 길을 걸었다.
리먼의 파산 신청 후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아 제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500억달러라는 헐값으로 상업은행인 BOA(Bank of America)에 팔렸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충격적 뉴스가 또 나왔다.
어떤 금융회사가 더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미국 증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최대 폭락(-4.42%)을 기록했다. 미국 투자은행의 거대한 손실은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이라는 핏줄을 타고 전 세계 금융기관으로 퍼져 전 세계증시의 5~7%에 달하는 동반 폭락을 불렀다.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자 '더 이상의 구제금융은 없다'던 미국정부는 그 다음날 AIG에 850억 달러의 지원을 발표했지만 금융시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몇 차례 임시방편으로 사태를 막아보려던 미국 정부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월가의 금융부실을 도려내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증시는 지난 2004년부터 3년간 단 하루도 3% 이상 급등락한 날이 없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가 본격화된 2007년에도 3% 이상 폭락한 날이 단 하루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1주일간 미국 증시는 9월 16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3% 이상 폭등, 폭락했다.
◆규제의 시대로
미국이 잃은 것은 크다. 그동안 세계 경제를 주도해 오던 금융질서를 잃었다.
전문가들은 1주일간의 금융공황이 1980년대 미국 레이건 행정부 이후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실질적인 종언을 뜻한다고 평가한다. 투자은행(IB)들이 복잡한 구조의 파생상품을 이용, 최소한의 자금만 가지고 수십, 수백배나 되는 큰 돈을 거래하는데도, 이에 마땅한 규제가 없었다는 것이 금융공황을 불러일으켰다. 앞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금융시장을 규제하고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수석연구원은 "이번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이념 아래 투자은행의 경쟁력을 무기로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잡아왔던 미국 경제에 제동이 걸린 것"으로 평가했다.
설령 금융위기가 진정되더라도,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되면 재정적자가 커지고 달러화도 약해지면서 미국의 위상은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미국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아직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대국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新)자유주의 (neoliberalism)
작은 정부와 큰 시장, 세계화와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경제 이념.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중시하는 케인즈 이론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을 계기로 후퇴하면서 경제학의 신주류로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영국의 대처리즘, 금융 자유화, 변동 환율제, 자유무역의 확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위기 수습될까=미국 정부가 만들려는 부실자산 정리기구는 89년 세워진 정리신탁공사(RTC)와 비슷하다. 당시 이 공사를 통해 296개 부실 저축대부조합(S&L)의 자산 1250억 달러를 인수했다. 이후 6년간 3940억 달러를 들여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747개 금융사 자산을 더 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LA타임스는 “당시 사들인 자산은 부동산이 많았다”며 “지금 문제되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관련 자산은 가치 산정이 훨씬 어렵다”고 평가했다. 부실자산을 사준다고 문제가 다 풀리는 것도 아니다. LA타임스는 “아마도 금융사는 부실자산 값을 확 깎아서 팔아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비관론자들마저 이번 조치가 금융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정부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면 모기지 채무 부담이 줄어 가계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재정 견딜 수 있나=미국 재무부와 FRB가 올 들어 금융위기 해소에 쏟아 부은 돈은 드러난 것만 5500억 달러가 넘는다. 실제론 더 될 거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다 추가로 지난해 미국 국방예산(6000억 달러)보다 많은 7000억 달러를 쓰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재정 부담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무조건 FRB에 떠맡기기도 쉽지 않다. 중앙은행이 가용 재원을 다 써버리면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어서다. 따라서 상당액은 국채 발행이나 다른 수단으로 메워야 한다. 미국은 올 회계연도에만 4000억 달러 안팎의 재정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스 앤드 푸어스(S&P)의 존 체임버스 국가신용등급위원회 의장은 최근 “구제금융으로 미국 재정이 나빠져 최상급(AAA)인 국가 신용등급의 하향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국가부도의 위험이 없고, 신용등급도 최상급이라고 국제경제 교과서에 돼 있지만, 자칫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9·11이 ‘월가 파산’ 전주곡이었나>
기사입력 2008-09-22 09:36 / 한겨례 / 조일준 기자9·11 테러 뒤 초저금리 정책 ‘재앙의 씨앗’
유동성 과잉으로 집값 거품·신용위기 불러
9·11테러가 7년 뒤 결국 미국의 심장부 월가까지 집어삼켰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이 나오면서, 7년 전 9·11테러가 월가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월가를 파산시킨 원인이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가 9·11 이후 경기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려 과잉유동성을 키운 것이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 위기의 뿌리인 서브프라임 사태는 9·11 테러의 충격으로부터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장기간의 저금리 정책이 낳은 결과이다.
2000년 하반기부터 미국은 정보통신(IT) 산업 부문의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급속한 경기 침체기로 빠져들었다.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BEA)의 자료를 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00년 3분기에 1%에도 못치는 성장률을 보인 뒤 2001년 들어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다. 이 와중에 터진 9·11 테러는 경기 하강국면에서 위축됐던 미국의 투자 및 소비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한 결정타였다.
위기를 타개할 구세주가 절실했다. 미 연준(FRB)의 앨런 그린스펀 당시 의장은 ‘초저금리 정책’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준은 2000년 5월 6.5%였던 연방 금리를 2003년 6월까지 13차례에 걸쳐 1%대까지 떨어뜨렸다. 특히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1월 이후 2% 이하의 저금리가 3년간이나 지속됐다. 이에 힘입어 2001년 4분기에는 국내총생산이 오히려 2.7% 성장세로 돌아섰다. 이듬해인 2002년 1분기에는 5.0% 성장을 기록했다.
넘쳐나는 유동성의 상당 부분이 주택 및 금융 파생상품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조지 소로스는 최근 저서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미국의 금융기관 등 대출업자들은 이자 수입을 늘리기 위해 주택을 실제보다 훨씬 매력 있는 자산으로 보이게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은 이미 5년 전인 2003년에 이같은 파생상품들을 ‘시한폭탄’ ‘금융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빗댔다. 그 시한폭탄들이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하면서 금융시장을 초토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 보코니대의 티토 보에리 교수는 지난해 ‘서브프라임 위기:그린스펀의 유산’이란 논문에서,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으로 △미국 가계들의 낮은 재무지식 △유동자산의 대규모 증권화를 가져온 금융제도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3년에 걸친 초저금리 정책을 꼽은 뒤, 이 중에서도 저금리정책이 절대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연준 이사진에선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에 방만한 금융대출 관행의 실태와 파장을 점검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린스펀은 묵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린스펀은 지난해 9월 <시비에스>(CBS)와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작동하길 원한다면, 얼어붙은 미국 은행시스템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 임무다. 이것은 금리를 서서히 내릴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저금리로 인한 유동성 과잉과 파생상품의 범람, 무책임한 서브프라임 대출이 불러온 위기에 대해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아주 최근까지 아무런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의 정치외교력을 손상시킨 9·11테러는, 미국 정부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과잉대응해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라는 참사의 밑바탕이 됐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패권에 타격을 주려는 9·11테러는 결국 그 목적을 일정 부분 달성한 셈이다.
<美경제 패러다임이 바뀐다… '신자유주의' 막내리고 관치경제시대로>
기사입력 2008-09-21 21:56 최종수정2008-09-22 10:19 / 세계일보 / 국기연 특파원
부시 행정부는 현재 미국과 세계의 금융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의 긴급성과 파급 영향 등을 고려할 때 경제 이념이나 정치 이념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12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의 자유 기업주의 시스템은 연방정부가 꼭 필요할 때 이외에는 시장에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서 “그러나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위험한 사태와 미국 국민의 일상 생활에 미칠 중대한 영향을 감안할 때 정부의 개입은 보장돼야 할 뿐 아니라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미국 금융시장의 대혼란을 방치했을 때 초래될 통제 불능 사태를 감안하면 정부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적극 개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미 정부 측 설명이다.
미 정계와 경제계는 부시 행정부의 이 같은 노선 전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최우선 가치로 상정해야 할 시점이라는 데 미국 사회에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다만 미국의 골수 보수파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큰 정부’라는 공화당 이념이 새로 탄생했다”며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개탄했다.
미 정부는 이제 경제의 감독 관청이 아니라 경제의 핵심 주체로 등장했다. 경제계에서는 ‘주식회사 미국’이라는 거대 공룡 기업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 정부는 초대형 모기지 업체인 패니매와 프레디맥을 사실상 국유화했다. 또 미국 최대 보험회사인 AIG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이 회사 지분의 80%를 인수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벌써 5000억달러 이상의 공적 자금을 쏟아부었다. 미 정부는 다시 7000억달러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 모기지 관련 부실 자산을 매입키로 했다. 미 정부가 이 같은 공적 자금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미 금융기관들의 생사가 엇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미국 금융기관들의 생사 여탈권을 쥔 ‘주식회사 미국’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상했다. 미국은 현재의 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민간이 아니라 정부가 이끌어가는 관 주도 경제 시대를 보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