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7-24 19:12 / 오마이뉴스 / 임동현기자
한동안 잠잠했던 '1000만 관객' 신드롬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개봉 4일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또다시 '1000만 관객' 돌파 운운하는 언론 기사들이 연일 올라오고 있다. 기사 제목만 봐도 '놈들의 전쟁... 천 만 관객 GO'(7월 17일 '노컷뉴스'), '송강호, 생애 두 번째 천 만 관객 영화 쏜다'(7월 21일 'OSEN'), '한국영화 '놈놈놈'으로 되살아나나'(7월 20일 '아시아경제') 등으로 마치 <놈놈놈>이 곧 1000만을 넘을 기세이고 1000만 돌파가 곧 한국영화 침체기를 한번에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여름 '1000만 신기루'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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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국 영화가 흥행하면 '1000만 관객을 돌파할 것인가?'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미도>를 시작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 등이 1000만을 돌파하면서 그간 꿈의 숫자라고 생각했던 '1000만 관객'이 흥행작의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선 아직 많은 이들이 모르는 듯하다.
지난해 여름, 한국영화계는 술렁거렸다.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에 이어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극장가를 강타한 것이다. 당연히 언론은 '누가 1000만 관객을 모을 것인가'와 함께 둘 중 하나라도 1000만을 넘기면 마치 한국영화의 침체가 싹 사라질 것처럼 말했었다. 분명 한국영화는 부활한다고 했다.
이 두 영화는 큰 흥행을 거뒀지만 1000만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다. 도리어 이로 인해 작은 영화들이 개봉관을 잡지 못해 개봉을 미루거나 적은 관객 수 때문에 간판을 걸자마자 퇴장하는 일이 생겨났다. 정가형제의 <기담>의 경우에는 멀티플렉스의 조기 종영에 대한 관객의 항의가 계속됐고 결국 예술영화관에서 장기상영하는 일도 생겼다.
이런 홍역을 치르면서까지 1000만 신화를 만들려했던 한국영화는 도리어 점차 관객 점유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에도 극심한 관객 부진과 최악의 점유율 속에서 한국영화는 신음해야 했다.
'1000만 관객' 뒤에 숨은 독과점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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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얼핏 반가운 일이지만 한 영화의 성공만으로 한국영화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논리가 과연 현실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바로 지난해의 사례만 들어도 충분히 답이 나온다.
따지고 보면 1000만 영화는 독과점과 몰아주기 없이는 나오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며 그것은 곧 다른 작은 영화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한국영화의 숨통을 틔울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한국영화 내부 시장을 더 좁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현재 1000만 관객 가능성이 높다는 <놈놈놈>은 전국 900여개의 스크린을 차지하고 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대략 3~4개의 스크린을 잡은 것은 기본이고 관객이 많이 몰리는 시간에는 심지어 6~7개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전체 상영관이 대부분 한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야기다.
독과점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1000만 관객 임박' 운운하는 언론의 설레발이다. 마치 1000만 영화만 나오면 한국영화가 다시 살아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1000만 영화' 만들기에 일조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1000만 관객 영화가 나온다고 한국영화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마치 대기업만 발전하면 한국 경제의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이게 문제다.
물론 <놈놈놈>을 위시해 <님은 먼곳에>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개봉하면서 한국영화가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들은 모두 대기업(CJ, 쇼박스, 롯데)의 후광 속에서 넉넉한 스크린을 보유하고 개봉하는 작품들이다.
대작들을 통해 어느 정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겨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기업 배급사들에 비해 작은 영화사들은 제대로 홍보도 하지 못함은 물론 보장된 상영시간조차 지킬 수 없다. 관객의 호평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멀티플렉스의 시장주의적 상영 편성이다.
시장주의 논리가 만들어낸 '1000만 신드롬'
1000만 관객은 냉정하게 말하면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다. 한 영화가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을 끌어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관의 독과점과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왠지 비애국자로 몰릴 것 같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이 있었기에 그간의 1000만 관객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
'1000만 관객'이야말로 어쩌면 신기루다. 이런 몰아가기가 오히려 관객들의 반발을 가져온다면 한국영화는 또다시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그저 대작 몇 편에만 신경쓰고 작은 영화를 외면하는 일들이 계속된다면 1000만 영화가 여러 편이 나와도 한국 영화는 그냥 이대로 머물게 될 것이다.
이제 '1000만 신드롬'을 그만 이야기하자. 대작만을 내세우며 '대작이 살아야 한국영화가 산다'는 시장주의 논리를 영화팬들에게 강요하지 말자. 적어도 영화팬들은 보고싶은 영화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