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6-25 02:15 최종수정2008-06-25 08:33 / 중앙일보 / 이영종기자
스탈린 소련 수상(1879∼1953)이 한국전쟁 발발 두 달 뒤 고트발트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극비 전문은 전쟁에 대한 그의 전략과 속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는 등 한국전쟁 촉발의 핵심 키를 쥐고 있던 스탈린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기원을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전망이다.
전문은 무엇보다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예상을 충분히 한 뒤 전쟁을 시작했고, 그럴 경우 소련이 얻게 될 이득을 면밀하게 계산에 넣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더 나아가 유엔군을 한국에 파병하려는 안보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기권으로 간주되는 불참을 택함으로써 미군 참전의 길을 터 주었다. 유럽 국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 차단을 위해 한국전쟁 쪽으로 미국의 관심을 분산시키겠다는 그의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전문을 분석해 연구논문을 쓴 베이징대 김동길 역사학부 교수는 “미국이 마셜정책을 통해 서유럽 국가에 대한 부흥지원을 본격화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이 동요하자 스탈린이 미국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여 이를 차단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에 맞서기 위해 소련은 동유럽 국가에 대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했을 것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당시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 정부에 대한 스탈린의 대응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스탈린은 전문에서 미국과 함께 중국까지 한국전쟁에 끌려들어오게 되면 “국제 세력균형에서 우리(사회주의권)에게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스탈린은 50년 1월 중·소 동맹조약 체결 협상 때 중국이 뤼순(旅順) 주둔 소련군 철수와 다롄(大連)항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자 마오쩌둥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고 설명했다. 스탈린은 같은 달 30일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남침을 승인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 방문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2월 2일 김일성에게 중국 측에는 이런 사실을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하는 등 중국에 대해 거리를 뒀다.
스탈린이 3차대전 발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전문에서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에 발목이 묶이게 되는 점을 언급한 뒤 “그럴 경우 3차 세계대전이 미뤄지게 됨으로써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시킬 충분한 시간을 벌게 된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미국이 참전하기를 바랐고, 안보리 불참도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학계에서 진행돼 온 한국전쟁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전망이다.
소련이 미국의 전쟁 개입을 우려해 한반도에서의 개전에 반대했고, 50년 미국이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선언을 통해 한국을 미 극동방위선에서 빼버리자 이에 고무된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한 것이란 그동안의 연구 결과와는 다른 새 사실들이 드러난 때문이다. 우드로윌슨센터의 냉전 시기 문헌 연구 프로젝트 책임자인 크리스틴 오스트만 박사는 “이번 스탈린 문건은 매우 새롭고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논평했다.
스탈린의 문건은 50년 당시 한반도의 운명이 소련과 미국·중국 같은 강대국의 이익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은 스탈린이 안고 있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카드였다” 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의 팽창이란 큰 밑그림을 토대로 한국전쟁의 전략을 짠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이 간과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동족 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데다 외세인 소련의 스탈린에게 48차례 이상 남침 전쟁을 승인해 달라고 매달린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수상이 1950년 한국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이길 희망했으며, 전쟁 발발 직후 소집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도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 공개됐다. 스탈린은 또 중국도 전쟁에 가담케 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모두 한반도에 발이 묶이는 상황을 만들려는 전략을 짰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50년 8월 27일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인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극비 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그해 7월 초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이 유엔군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데 대한 고트발트의 문제제기에 대해 “미국에 안보리 다수결 결의를 쉽게 얻도록 해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서의 군사 개입에 말려들게 됐으며 군사적 위신과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특히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 보자”며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탈린 전문은 베이징대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가 2005년 러시아의 3대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RGASPI)에서 입수한 옛 소련 자료(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에 포함돼 있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스탈린이 직접 개전을 전후한 국제정세와 자신의 전쟁 구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건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문건은 스탈린이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반대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문 말미에 스탈린은 철수했던 유엔 안보리에 소련이 복귀하려 한다면서 “이는 미국 정부의 호전적 정책을 폭로하고 미국이 안보리를 이용하는 걸 막는 데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스탈린은 일급비밀로 분류된 전문의 보안 유지를 위해 암호명 '필리포프(Filippov)'를 썼고,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구두로 고트발트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전문을 분석해 '고트발트에 보낸 스탈린 전문과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연구논문을 마친 김 교수는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하게 된 배경을 포함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새로운 각도로 설명해주는 문건”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연구 결과는 그가 초빙연구원으로 있는 미국 워싱턴 우드로윌슨센터의 '국제 냉전사 프로젝트' 논문집에 25일 발표될 예정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위키피디아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모두 상대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남한)에 있어 한국 전쟁은 적화 통일의 야욕을 가진 북한(북조선)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방어전이며, 대한민국국군(남한군)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인민 무력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경우는 약간 다른데, 북한은 대한민국(남한)정부 수립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던 주한미군을 남한에 대한 미국의 침략으로 간주, 북한 인민 무력의 명분상 주적은 미군이었다. 원인의 대략적인 설명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으나,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북조선)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한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탈린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 주도설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라는 설로,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련공산당의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에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 전쟁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였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북조선)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내란 확전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2.7 구국투쟁, 야산대 투쟁, 4.3항쟁,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제한적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을 긴급 점령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함)
-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국군 독단으로 38도 선을 넘어 북진 시작, 중국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듬)
- 고착/제한 전쟁(51.6월 ~ 휴전, 휴전협상과 함께 38도 선 근방에서 점령지 확보를 위한 국지전이 계속됨).
이러한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침/남침설, 우발/의도설, 주도/응전설 등의 기존 시각이 모두 요점을 놓친 단편적 시각이라고 비판한다.